5화
‹ ›칠십오만 원이라는 돈은, 확실히 이 몸의 통장 사정을 생각하면 거의 인생 역전에 가까운 액수였다. 오십 평생 원룸 전세금 마련하겠다고 적금 붓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저 숫자가 주는 무게감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돈을 손에 쥔 순간 나는 기쁨보다 먼저 계산기를 두드리는 쪽으로 머리가 돌아갔다. '이걸 어디에 숨기지',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그런 식으로.
통장에 넣어두면 눈에 띌 것 같아서, 나는 돈을 나눠 학교 근처 은행 두 곳에 각각 소액씩 예치했다. 한 군데는 이십만 원, 다른 한 군데는 십오만 원 정도로 나눠 넣었는데, 창구 직원이 "학생이 이렇게 목돈을 넣으시네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걸어와서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알바비 모은 거예요" 하고 둘러댔는데, 직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요컨대, 나는 지금 시대의 은행원 눈빛 하나에도 벌벌 떠는 처지였다.
나머지는 방 안 낡은 책 사이에 숨겨두는 식으로 처리했다. 하필이면 아무도 안 펼쳐볼 것 같은 경제학원론 하드커버 두 권 사이에 지폐를 끼워 넣었는데, 이게 은근히 완벽한 은닉처였다. 신입생이 경제학원론을 펼칠 일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너무 갑자기 부자가 되면 의심을 산다'는 건 오십대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몸에 새겨진 원칙 같은 거였다. 사업하다 한 번 망해본 사람은 안다. 갑자기 생긴 돈은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걸린다는 것을.
문제는 그렇게 조심하다 보니 겉으로 보이는 일상은 여전히 궁핍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여전히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고, 옆방 동기가 "도현아, 밥 먹었어?" 하고 물어올 때마다 "응, 대충" 하고 얼버무렸는데, 그 대충이라는 게 실은 라면 한 봉지를 셋으로 나눠 이틀에 걸쳐 먹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라면 국물에 찬밥을 말아 먹었는데, 그게 또 나름 먹을 만해서 스스로도 좀 놀랐다. '이 나이에 자취 노하우가 다시 살아나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통장에 백만 원 가까운 돈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이런 궁핍을 자처하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우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체를 숨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그날 오후, 나는 학교 앞 비디오 대여점에 들렀다. 다음 경주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었고, 그동안 이 세계의 문화를 조금 더 파악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몸으로 살아가려면, 이 시대 사람들이 뭘 보고 뭘 웃고 뭘 좋아하는지 최소한의 데이터베이스는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 중에 어색하게 삐끗할 게 뻔했으니까.
대여점 안은 좁고 어두웠는데, 진열대 앞쪽에는 로맨스 영화와 액션 영화가 섞여 있었고, 안쪽 구석에는 커튼이 쳐진 별도 구역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진열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케이스 뒷면의 줄거리를 읽어 내려갔다. 대부분이 낯선 배우, 낯선 줄거리였지만, 가끔 익숙한 제목이 눈에 걸릴 때마다 묘한 반가움이 들었다. '이 영화, 내가 살던 시대에도 명작이라고 불렸던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잠깐이지만 이 시대와 저 시대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그 커튼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서 킥킥거리는 소리였는데, 나는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가 커튼을 살짝 들추고는 얼어붙었다.
그 안쪽 구역은, 전형적인 성인 코너였다. 다만 벽면을 가득 채운 비디오 케이스에 그려진 게 하나같이 벗은 남자였고, 그 코너를 서성이던 사람들도 전부 여자였다. 나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걸 느꼈다.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오십 평생 쌓아온 사회 통념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커튼을 다시 내리며 뒤로 물러섰는데, 발이 꼬여서 하마터면 옆에 놓인 진열대를 넘어뜨릴 뻔했다. 그 와중에 대여점 주인이 웃으며 "거기 남자 손님은 신기하게 잘 안 가시는데" 하고 말을 걸어와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나도 안 가고 싶었는데요.' 속으로 그렇게 항변해봤지만 주인은 이미 다른 손님을 상대하러 자리를 옮긴 뒤였다.
일반 코너를 둘러보며 무난한 영화 한 편을 고르려던 참에,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혹시 그거 재밌어요?"
돌아보니 키가 큰 여자가 서있었는데, 어깨가 넓고 체격이 다부졌으며 눈빛이 유난히 또렷했다. 짧게 친 머리에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는데, 서있는 자세만 봐도 뭔가 운동을 오래 한 사람 특유의 곧은 느낌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게 이수아였는데, 그때는 그저 배구 선수처럼 보이는 낯선 2학년생일 뿐이었다.
나는 손에 든 비디오 케이스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아, 이거요? 아직 안 봐서 모르겠는데" 하고 대답했는데, 이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이 꽤 노골적이어서, 나는 순간 옷매무새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 그런데 신입생이죠? 경영학과" 하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조금 놀라며 "어떻게 아세요" 하고 반문했다. "소문 났던데요, 오티에서 정하은 선배랑 뭔 일 있었다고" 하고 이수아가 웃으며 말했는데, 나는 그 말에 순간 얼굴이 굳는 걸 느꼈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세계에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얼마나 빠르게 퍼지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이건 마치 SNS도 없던 시절에 이 정도 속도로 소문이 도는구나 싶어서, 사람 입이라는 매체가 얼마나 무서운 전파력을 가졌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별거 아니었어요" 하고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는데, 이수아는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그런 거 별거 아니라고 하는 남자애는 별로 없던데" 하고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유난히 오래 내게 머물렀는데, 그건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뭔가를 저울질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십 평생 사람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 시선의 무게를 모를 리 없었다. 마치 이 사람이 나를 어떤 카테고리에 분류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운동 하세요?" 하고 나는 어색함을 지우려는 겸 화제를 돌려봤는데, 이수아는 "배구부요" 하고 짧게 답했다. '역시' 하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격이나 자세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었으니까.
"이름이 뭐예요?" 하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강도현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수아는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기억해둘게요" 하고 웃으며 대여점을 나섰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나는 결국 아무 영화나 대충 집어 대여를 하고 대여점을 나섰는데, 정작 그날 밤 그 영화를 볼 정신은 없었다. 이수아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방 안에 숨겨둔 돈과 오늘 겪은 일들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정하은과의 일, 김서연의 경계, 그리고 방금 이수아라는 여자의 저 눈빛까지, 이 세계에서 나는 어느새 여러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십 평생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게 최고의 생존 전략이라고 믿어왔던 사람으로서,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상황은 영 익숙하지 않았다.
'조용히 경주만 뛰고 조용히 돈만 모으면 되는데, 왜 자꾸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방 안 낡은 책 사이에 숨겨둔 돈뭉치를 다시 확인하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돈의 두께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얇아져 있었다.
'...이게, 뭐지.' 몇 번을 다시 세어봐도, 처음 숨겨둔 액수와 지금 손에 든 액수가 미묘하게 맞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 이 방에 손을 댄 걸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이, 이수아의 그 눈빛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