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자, 마법소녀 되다

2화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이도현은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뼈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감각. 관절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지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렸다. 우드득. 피부가 벗겨지고 새로 덮이는 감각. 살가죽 밑으로 뭔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물감이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퍼졌다. 토할 것 같았다. 토할 힘조차 없었다. 위장이 뒤집히는 것 같은데 위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거 뭐야, 진짜 뭐야.〉 【경고.】 【미등록 개체의 강제 접속이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객님.】 기계적인 존댓말이 머릿속에 그대로 박혔다. 이 상황에 존댓말이라니. 이도현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흰 생물이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작은 몸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큐응! 큐응! 이거 큰일 났어! 남자가, 남자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같은 단어만 반복했다. 큐응, 큐응. 빛이 사라졌다. 칼은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칼끝에서 반사된 빛이 벽에 붙박인 듯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검은 모자의 남자, 하동원이 눈을 크게 떴다. 턱이 살짝 벌어졌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잔해 위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금발의 긴 머리가 양쪽으로 묶여 흔들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트윈테일. 바람도 없는데 머리끝이 살랑거렸다. 하얀 프릴이 달린 짧은 드레스. 레이스 자락이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 위에서 하얗게 빛났다. 손목에는 리본이 감겨 있었다. 키는 작았다. 눈은 크고 파란색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매끄러웠다. 먼지와 파편 사이에 서 있는데도 옷 한 자락 더러워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30살 직장인이었던 이도현의 몸이, 이제는 어디서 봐도 소녀였다. 〈뭐야, 이거.〉 생각은 이도현의 것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어라라~? 이게 뭐야, 진짜 웃기네." 콧소리가 섞인 높은 톤. 입술 끝이 저절로 올라갔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말투가 이상했다. 생각과 말이 따로 놀았다. 〈뭐라고 한 거야, 방금.〉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너 누구냐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다시 입을 열려는데, 또 마음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저씨, 표정이 왜 그래? 귀여운 애 처음 봐?" 손가락 하나가 저절로 올라와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이도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동작이었다. 하동원의 얼굴이 굳었다. 눈썹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 "...너, 뭐냐."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몰라도 돼. 아저씨는 이제 끝났으니까." 비웃음이 섞인 말투. 손짓 하나에도 조롱이 담겼다. 손목의 리본이 팔랑거렸다. 이도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이런 말투를 쓸 리가 없는데.〉 서른 살 먹은 남자가 이런 애교 섞인 말투를 쓸 이유가 없었다. 〈이거 누구야, 도대체.〉 몸은 소녀였다. 말투는 낯선 존재였다. 기억은 여전히 30세 직장인 이도현의 것이었다. 세 개가 한 몸에 겹쳐 있었다. 퍼즐이 잘못 맞춰진 것처럼 어딘가 자꾸 어긋났다. 흰 생물이 허공을 날아 이도현의 어깨 위로 착지했다. 작은 발톱이 어깨를 콕콕 눌렀다. "큐, 큐응... 이거 진짜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넌 또 뭐야." 이도현의 입이 물었다. 이번엔 그의 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소리에서 짜증이 그대로 새어 나왔다. "난 몽이야. 시스템 관리 담당. 근데 너, 남자잖아. 남자가 브로치를 가져가면 안 되는 거였어. 여자 후보자만 변신할 수 있게 설계됐다고!" 몽이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 봐, 진짜로." 【알림.】 【미등록 성별의 계약자가 발생했습니다.】 【본사 규정 위반으로 인해 계약 파기가 검토될 수 있습니다.】 【단, 강제 접속으로 형성된 계약은 즉시 해지가 불가능합니다.】 【계약 해지 조건은 추후 안내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알림창이 또박또박 떠올랐다 사라졌다. 존댓말과 상황의 낙차가 너무 커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몽이가 얼굴을 감쌌다. 작은 손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이었다. "큐응... 이거 위에 보고하면 나 잘려." "...너 잘리는 게 지금 문제야?" 이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이번엔 이도현의 생각과 거의 일치했다. 하동원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 손끝이 위로 향하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이 풀리듯, 칼끝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방향을 잡았다. 이도현의 눈이 그것을 쫓았다. 몸이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다리에 힘이 넘쳤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감촉조차 낯설게 선명했다. 조금 전까지 부러졌던 다리가 멀쩡한 상처 하나 없이 서 있었다. 〈이거...〉 부러졌던 정강이를 내려다봤다. 상처도 흉터도 없었다. 멍조차 없었다. 칼이 곧장 날아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서걱- 칼이 바로 옆 기둥을 갈랐다. 콘크리트 가루가 흩날렸다. 이도현이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생각보다 정확하게.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하동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빠르군." 목소리에 옅은 감탄이 섞였다. 이도현은 잔해 위에 서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에 옅은 분홍빛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작고 하얀 손가락, 어디서도 서른 살 남자의 손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낯선 탄력이 느껴졌다. 〈이 힘, 대체 뭐지.〉 몽이가 어깨 위에서 소리쳤다. 작은 몸이 파닥거렸다. "조심해! 저 사람 흑림단 소속이야. 진짜 위험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 두 자루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쐐애액- 칼날이 좌우에서 좁혀오며 허공을 갈랐다. 이도현의 입이 저절로 웃음을 지었다. 생각과 다른, 조롱기 섞인 웃음이었다. 몸이 뒤로 크게 젖혀지며 두 칼날 사이를 정확히 통과했다. "아저씨, 그거밖에 못 던져?" 말이 나가고 나서야 이도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미쳤어, 나.〉 이 몸에 들어온 게 대체 누구인지, 정신이 몇 개나 겹쳐 있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동원의 눈에 불쾌함이 스쳤다. 망토가 크게 부풀었다. 바람도 없는데 옷자락이 저절로 일어섰다. 허공에서 새로운 칼 다섯 자루가 떠올랐다. 칼날들이 서서히 정렬하며 각기 다른 각도로 이도현을 겨눴다. 이도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자루가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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