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결국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십 분을 더 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도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숨소리가 거칠었다가 점점 가라앉는 걸 지켜보면서도 나는 계속 방패를 쥔 손을 풀지 못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던전 안인데도 습한 공기가 목덜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괜찮냐."
내가 물었다.
"죽을 것 같은데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도현이 헐떡이며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억지로 끌어올린 표정 같았다.
준호는 그 사이 지도 앱을 켜고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이 구역 지나면 넓은 공터가 있대."
준호가 말했다.
"거기서 좀 오래 쉴 수 있을 거야. 후기 보니까 던전 안에서 제일 안전한 지점이라던데."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지."
도현이 힘없이 말했다.
"몸이 안 따라줘."
그 말에 준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도현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첫 던전이라고 얕본 건 아니었는데, 체력 관리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이제야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강의에서는 분명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고 백 번은 말했는데, 막상 실전에서는 그게 다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물 좀 마셔."
내가 물통을 건넸다. 도현이 받아 마셨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고맙다."
"고마우면 다음부턴 페이스 좀 지켜."
"알아, 아는데 몸이 안 들어."
십 분이 지났다. 도현의 숨이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나는 방패를 고쳐 잡았다. 손끝의 감각을 다시 확인하듯 손가락을 몇 번 굽혔다 폈다.
"내가 앞장선다. 도현이는 뒤에서 천천히. 준호는 중간에서 마법 대기."
"오케이."
준호가 지팡이를 들었다. 아직 제대로 쓴 적 없는 초급 지팡이였다. 나무 재질에 끝부분에만 작은 보석이 박혀 있는, 튜토리얼 상점에서 산 가장 싼 물건이었다. 준호는 그걸 마치 처음 쥐어보는 무기처럼 어색하게 고쳐 잡았다.
"이거 쓸 일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소리 하면 꼭 쓸 일 생겨."
도현이 낮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칼날이 이끼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쩍였다.
걸음을 옮겼다. 벽면의 이끼 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은은하게 통로 전체를 비추던 초록빛이, 지금은 발밑에서만 겨우 형체를 알아볼 정도로 옅어졌다.
"어두워지는데."
준호가 중얼거렸다.
"공터 근처는 원래 이런가."
"몰라. 정보 없어."
내가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이 던전에 관한 정보 자체가 부실했다. 초보자용이라고는 하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자료가 없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구간도 어떤 후기에는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발소리가 통로에 묘하게 울렸다. 세 사람의 숨소리, 갑옷과 천 조각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까지 뒤섞여 귀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앞쪽에서 형체가 나타났다.
슬라임보다 훨씬 큰 개 형상의 몬스터였다. 몸통이 검은 그늘 같았고, 윤곽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눈이 붉게 빛났다. 그 눈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지점이었다.
[경고: 미확인 개체 감지]
시야 한쪽에 뜬 문구였다. 글자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튜토리얼 강의에서 미확인 개체는 무조건 회피 대상이라고 배웠다. 확인된 몬스터는 패턴이 있어 대응이 가능하지만, 미확인 개체는 패턴 자체를 모른다. 그 말은 즉,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정보 없이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거 뭐야."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의에서 안 나온 놈이야."
도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몬스터가 짓기 시작했다.
크르릉.
낮고 긴 울림이었다. 짐승의 울음이라기보다는 기계가 마모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몬스터가 다가올 때마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방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퇴!"
내가 외쳤다.
"규칙대로! 정보 없는 개체는 무조건 후퇴!"
강의에서 배운 대로였다. 정보가 없으면 무조건 도망친다. 이건 자존심을 세울 상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방패를 앞세웠다. 준호도 몸을 돌리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도현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몬스터 뒤쪽, 어둠 속 무언가를 향해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기..."
그가 중얼거렸다.
"사람이 있어."
어둠 속에서 형체가 드러났다. 긴 귀. 은빛 머리카락. 사슬에 묶인 채 벽에 기대 있는 여자였다. 피부가 창백했고, 옷은 낡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사슬이 벽에 박힌 고리에 걸려 있었고, 그녀의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엘프잖아."
도현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다리에 힘이 없다던 사람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눈빛에 어떤 열기가 돌았다.
"저 여자, 갇혀 있는 거야."
"도현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준호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몬스터가 우리 앞에 있는데 저게 눈에 들어와?"
몬스터가 다시 다가온다.
한 걸음.
붉은 눈이 우리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
"도현아!"
내가 다시 불렀다. 이번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도현은 이미 검을 들고 몬스터 쪽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 여자를 구해야 해!"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소리쳤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규칙, 원칙, 생존 우선. 방금까지 스스로 외쳤던 말들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졌다.
나는 방패를 들고 그를 따라 달렸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몬스터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도현의 팔뚝에서 피가 튀었다. 붉은 방울이 어두운 바닥에 흩뿌려졌다.
"으아악!"
도현이 비틀거렸다. 그래도 검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쥐었다.
"괜찮아, 나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준호가 지팡이를 겨눴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팡이 끝의 보석이 흔들리는 손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렸다.
"주문... 뭐였지, 뭐였지..."
처음 써보는 스킬을 실전에서 떠올리려는 리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그 순간에도 도현을 방패로 감싸며 몬스터의 다음 공격을 막아낼 자세를 잡았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방패 표면에 몬스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슬에 묶인 엘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서늘한 계산 같은 게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도와줘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이건 그냥 갇힌 사람이 아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발이 먼저 멈춰섰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몸 어딘가에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도현아, 물러나!"
내가 외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슬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채, 오직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인 얼굴로.
몬스터가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티는 처음으로 완전히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