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스템, 그 미션은 제 겁니다

1화

형광등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완전히 꺼졌다. 암전. 숨을 들이쉬는 소리마저 방 안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다시 켜졌을 때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모니터 화면이었다. 17시간째 켜져 있던 그 화면. 랭킹전 승리 메시지가 아직도 떠 있었다. 축하합니다. 승급하셨습니다. 축하는 개뿔. 눈이 뻑뻑했다.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것조차 사포로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마우스를 너무 오래 쥔 탓이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봤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입 안이 말라붙어서 침을 삼키는 것조차 아팠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는 기분. 시계를 봤다. 오전 6시 14분. 숫자를 두 번 다시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어제 오후 1시쯤에 시작했다.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다. "미친." 혼잣말이 갈라져서 나왔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가 뚝 소리를 냈다. 다각. 이상한 소리였다. 뼈 소리가 아니었다. 의자 관절음도 아니었고, 책상 서랍이 열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 순간 눈앞에 뭔가가 떴다. 파란 창. 반투명한, 게임에서나 보던 그 흔한 UI. [각성이 확인되었습니다.] 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 랭킹전 창이었다. 분명 그거였는데.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건 게임 창이 아니었다. 모니터 밖에, 방 한가운데에 그 파란 창이 떠 있었다.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여전히 떠 있었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창을 그대로 통과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감각이 없었다. 허공을 만진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한 번 더 찔러봤다. 결과는 똑같았다. "이거 뭐야." 대답은 없었다. 창은 그냥 거기 떠서, 나를 기다리듯 깜박였다. 깜박, 깜박. 형광등도 아닌데 그 리듬이 아까 꺼졌던 불빛과 똑같았다. *** 방문을 열었다. 거실 쪽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낮은 볼륨인데도 유난히 다급했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빠르게 튀었다. "…강남 일대에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으며, 정부는 현재…" 말이 자꾸 끊겼다. 마치 방송국도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등이 굳어 있었다. 리모컨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톱이 리모컨 플라스틱에 하얗게 파고들어 있었다. 아빠는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뒷모습이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창밖. 하늘 한쪽에 검은 점이 떠 있었다. 점이라기보다는 구멍 같았다. 빛을 삼키는 구멍. 크기가 짐작이 안 갔다. 너무 멀어서, 혹은 너무 커서. 그 주변 하늘만 이상하게 색이 짙었다. 마치 하늘에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색이 퍼져나가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느낌. "저게 뭔데." 내 목소리에 엄마가 화들짝 돌아봤다. "도윤아. 너 이제 일어났어?" 어이없다는 표정과 걱정이 반쯤 섞여 있었다. "뭐야 저거." "게이트라고 하던데." 아빠가 대신 대답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어제 오후부터 전 세계에 저런 게 열렸대. 서울에도 몇 개." "…나 그동안 뭐 했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너무 한심해서 나조차 놀랐다. 엄마가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어떤 말이 담겨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시선을 피했다. 17시간 게임하는 동안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다는 얘기였다.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었다. 항공샷으로 잡힌 게이트 영상이었다. 그 앞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총구가 죄다 그 검은 구멍을 향해 있었다. 무의미해 보였다. 저런 것에 총알이 무슨 소용일까. "저기 사람들 들어갔대?" 내가 묻자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무도. 근데 각성자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더라." 각성자. 그 단어가 방금 전 파란 창과 겹쳐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동생이었다. [도하] 오빠!!! 살아있어?? [나] 어 살아있어 [도하] 다행이다 진짜 연락 안 돼서 죽은 줄 알았잖아 [나] 게임하다 잠깐 정신 놓았었어 [도하] 오빠 각성했어?? 각성. 방금 그 파란 창이 떠올랐다.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잠깐 멈췄다. [나] 뭔가 뜨긴 했는데 [도하] 오 진짜? 뭐라고 뜸 [나] 각성이 확인됐습니다 [도하] 대박 오빠 진짜네 ㅋㅋㅋㅋ근데 하필 게임하다가 각성한 거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17시간 게임한 죄로 인류의 대전환기를 통째로 놓친 셈인데, 동생은 그게 웃긴가 보다. [나] 너는 뭐 각성했어? [도하] 나는 아직 근데 오빠 조심해야 돼 각성자들 벌써 던전 들어가고 그런다는데 [나] 던전? [도하] 어 검은 구멍들 다 던전 입구래 각성하면 자동으로 끌려들어간다는 얘기도 있고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창밖의 그 검은 점. 게이트. 거실에서 봤던 그 먹물 같은 색이 다시 떠올랐다. [나] 끌려들어간다는 게 뭔소리야 답이 좀 늦게 왔다. 메시지 창에 '입력중…' 표시가 떠 있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떴다가 사라졌다. 세 번쯤 반복됐다. [도하] 나도 정확히는 몰라 조심해 진짜로. 마지막 문장 뒤에 마침표가 하나 더 찍혀 있었다. 습관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를 삼키고 뱉은 마침표처럼 보였다. 동생의 말투를 대충 안다. 원래 마침표를 잘 안 찍는 애다. 그런데 지금은 두 개나 찍혀 있었다. ***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파란 창은 여전히 그 자리에 떠 있었다.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이번엔 허리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각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상태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손을 뻗어 '확인'을 눌렀다. 손가락이 다시 창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번엔 반응이 왔다. 뭔가가 손끝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촉감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 반응했다는 감각적인 신호였다. [김도윤] [Lv. 1] [HP 100 / 100] [MP 20 / 20] [특이사항: 실적(Achievement) 시스템 활성화] 한동안 그 글자들을 그냥 바라만 봤다. 레벨 1. HP 100. MP 20. 무슨 신규 캐릭터 생성 화면 같았다. 실적. 다른 항목은 몰라도 이 단어는 낯설지 않았다. 게임에서 늘 보던 그거였다. 캐릭터 레벨 올리는 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나는 항상 그것부터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도전과제 100% 달성. 그게 내 인생 최대 업적이었다. 친구들은 그걸 보고 '병신 짓'이라 불렀다. 근데 이제 그게 현실에도 있다고?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뭔지 몰라도." 혼잣말이 방 안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밌어질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밖의 검은 점이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봤다. 커지고 있었다. 분명히. 경계가 흔들리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늘을 더 많이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의 파란 창이 다시 깜박였다. 깜박, 깜박, 깜박. 이번엔 리듬이 빨라져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