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스템, 그 미션은 제 겁니다

2화

빛이 먼저 왔다. 방 안 전체가 흰색으로 번졌다. 형광등이 아니었다. 형광등이라면 저렇게 눈알을 찌르듯 파고들지 않는다. 저건 태양을 방 안에 가둬놓고 스위치를 켠 것 같은 빛이었다. 창밖의 검은 점, 그 게이트에서 뭔가가 뻗어 나왔다. 실이었다. 아니, 빛의 실이었다. 그게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엄마!" 외침이 목구멍에서 반쯤 걸렸다. 평소라면 방문 열고 뛰어나갔을 텐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밑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바닥이 있는데 발이 그걸 느끼지 못했다. 마치 다리가 통째로 마취된 것 같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봤는데 시각으로는 확인됐지만 감각으로는 확인이 안 됐다. 쿵. 소리가 났고, 나는 넘어졌다. 손바닥에 닿는 게 방바닥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 젖은 흙냄새. 방바닥에서 흙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그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지워졌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천장이 없었다. 아니, 있긴 한데 너무 높았다. 회색 하늘이 뒤덮여 있었다. 구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냥 회색 페인트를 하늘에 발라놓은 것 같은 색이었다. 주변은 온통 무너진 건물 같은 형태였다. 콘크리트인데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표면이 살짝 맥동했다. 숨 쉬는 벽이라니, 인테리어 잡지에는 안 나올 법한 컨셉이다. "…뭐야 이거."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사방이 막혀 있는데도 소리가 이상하게 멀리서 튕겨 돌아왔다.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굳어 있었다. 무릎을 짚고 겨우 섰다. 종아리가 후들거렸고, 관자놀이 뒤쪽으로 두통이 짧게 지나갔다. 파란 창이 다시 떠올랐다. [던전 진입이 확인되었습니다.] [강남 게이트 1구역 - 하위 던전] [탈출 조건: 층 클리어 또는 시간 초과 (72시간)] 72시간. 숫자를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집에 있던 방금 전까지의 나와, 지금 여기 서 있는 나 사이의 거리가. 72시간이면 게임이라면 클리어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근데 이건 세이브 파일이 없다. 죽으면 그냥 끝이라는 소리다. "강제 소환이라니." 웃음이 아니라 헛웃음이 나왔다.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이름조차 없이, 그냥 여기 처박아 넣는 게 이 세계의 방식인가. 스킵 버튼도 없고, 난이도 선택도 없다. 그냥 랜덤박스에서 뽑힌 기분이었다. 최하 등급 확정인 랜덤박스. ***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이 있었다.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상단 바에는 안테나 표시가 아예 사라지고 대신 낯선 아이콘 하나가 깜빡였다.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자함은 그대로 열렸다. [도하] 오빠 괜찮아?? [도하] 오빠 답장 좀 [도하] 오빠 나 진짜 걱정된단 말이야 세 개가 연달아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몇 분 사이였다. 저 성격에 저 정도면 지금 방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답장을 눌렀다. [나] 나 던전 들어온 거 같아 괜찮아 살아있어 답이 바로 왔다. 너무 빨랐다. 신호가 안 잡히는데. 손끝이 살짝 저렸다. 별거 아닌 걸로 이상하다 느끼는 게 이상했지만, 이상함을 느끼는 감각만큼은 아직 살아 있었다. [도하] 어디 던전인데 [나] 강남 1구역이래 [도하] 다행이다 1구역은 그나마 약한 편이래 순간 목뒤가 서늘해졌다. 동생이 이런 정보를 어디서 알아. 던전 등급이니 위험도니 하는 건 뉴스에서도 아직 제대로 못 다루는 신생 재난이었다. [나] 그런 정보를 어디서 알아 답이 오지 않았다. 1분. 2분. 핸드폰 화면이 아직 밝은 걸 확인했다. 배터리는 78퍼센트. 이상하게 그런 숫자까지 눈에 들어왔다. 긴장하면 오히려 쓸데없는 디테일에 집착하게 되는 버릇이 있다. [도하] ㅁㅇㄴ아 미안 오타 [도하] 인터넷에서 봤어 다들 그러던데 타이핑이 다시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처음 온 문장은 '오타'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조합이었다. 자판을 잘못 눌러서 나올 수 있는 글자 배열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메시지를 쓰다가 지운 것 같았다. 뒤에 뭔가 더 있었는데 급하게 지운 흔적. "…뭔데." 입 밖으로 꺼낸 의문이 답 없이 흩어졌다. 회색 하늘 아래에서 혼잣말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만큼 빨리 삼켜졌다. *** 계속 걸었다. 무너진 구조물 사이를 지나며 방향을 가늠했다. 딱히 지도가 없어서, 그냥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걸었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에서 배운 등고선 개념이 이런 데서 쓰일 줄은 몰랐다. 바닥은 균일하지 않았다. 어떤 구간은 딱딱한 콘크리트였고, 어떤 구간은 발이 살짝 꺼질 만큼 부드러웠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으로 미묘한 진동이 전해졌다. 심장 박동 같기도 했다. 감시받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 목덜미가 계속 따가웠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알이 등 뒤에 붙어 있는 것처럼, 시선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관찰 대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창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관찰 대상." 혼잣말이 조금 갈라졌다. 이 시스템이라는 게, 이 세계라는 게, 그냥 나를 지켜보는 눈알 같은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임 속 관전 모드처럼. 다만 이번엔 내가 캐릭터고, 누군가가 시청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시청률이 대체 몇이나 나올지 궁금해졌다. 하위 던전 신인 캐릭터, 초반 탈락 유력, 그런 태그가 붙어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도하] 오빠 지금 어디쯤이야 [나] 몰라 그냥 걷고 있어 지도가 없어서 [도하] 조심해 거기 회색 괴물 나온다는 소문 있어 회색 괴물. 이름도 안 붙었는데 벌써 소문이 돈다는 게 이상했다. 시스템 창에 정식 명칭도 안 뜬 대상이 벌써 인터넷에 떠돈다니, 정보의 속도가 이상하게 빠르다. [나] 너 진짜 뭐 아는 거 있지 답이 다시 늦어졌다. 느낌표 세 개짜리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대신 짧은 한 문장이 왔다. [도하] 그냥 걱정돼서 그래 마침표. 느낌표 없이, 그냥 마침표. 동생다운 말투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물음표 세 개, 이모티콘 두 개는 기본으로 붙였을 텐데. 화면을 몇 초간 더 들여다봤다.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았다. ***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쩌 억―. 뒤쪽 구조물 하나가 갈라지듯 무너졌다. 먼지가 피어올랐고, 그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느린 걸음이었다. 숨죽이고 벽 뒤에 몸을 붙였다. 차가운 표면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숨을 최대한 얕게 쉬었다. 폐 속 공기를 아끼는 기분으로. 먼지 사이로 형상이 드러났다. 처음엔 사람인가 싶었다. 키가 크고 팔이 길었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사람 같지 않았다. 관절이 반대로 접혔다. 무릎이 아니라 팔꿈치처럼 굽혔다. 얼굴이 마지막에 보였다. 잿빛에 가까운 녹회색 피부. 눈이 지나치게 크게 벌어져 있었다. 코는 있는지 없는지 애매했다. 입은 위아래로 갈라져서, 웃는 건지 찢어진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손에는 나이프가 있었다. 날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회색 하늘 아래에서 저것만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그 순간 파란 창이 다시 떴다. [신규 개체 발견: 회색귀인(灰鬼人) - 임시 명칭 등록] "…내가 지금 이름 붙인 건가." 혼잣말이 떨렸다. 숨을 죽였는데도 그놈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관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긴 목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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