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지나갔다.
강도현은 눈을 떴다. 하얀 공간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벽도 없고 바닥도 없었다. 그냥 흰빛뿐이었다.
발을 내려봤다. 밟히는 감촉이 없었다.
이건 또 뭔 개짓거리인데.
두 손을 들어 자기 몸을 살폈다. 팔도 그대로고 손가락도 열 개 그대로였다. 옷차림도 방금 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게 없는데 공간만 통째로 바뀌었다.
여긴 또 뭔데.
[명천 시스템 대기실입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대기실이면 여기서 뭘 기다려야 하는 건데.
[임무 배정을 대기합니다.]
강도현은 팔짱을 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사람을 강제로 끌고 왔으면 최소한의 설명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야, 명천이. 너 이름이 명천이지.
[명천 시스템입니다.]
그래, 명천아. 나 왜 데려온 거냐.
[특이 개체는 명천 시스템의 계약자로 선정됩니다. 선정 기준은 비공개입니다.]
비공개는 또 뭔데. 사람 뽑아놓고 이유도 안 말해줘.
[규정입니다.]
강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규정 좋아하네.
납치도 아니고, 계약도 아니고, 선정이라니.
말은 참 곱게 하네.
대기실 한쪽에 작은 창 같은 것이 열렸다. 그 안으로 세계 각지의 균열 영상이 흘러나왔다. 도시 상공에 검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강도현은 그것을 유심히 봤다.
저 균열이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균열은 무림대륙과 현재 세계를 잇는 통로입니다. 특이 개체는 무림대륙으로 이동해 임무를 수행합니다.]
무림대륙.
강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 무협 같은 거 말하는 거냐.
[정확한 명칭입니다.]
이 시스템 새끼가 사람을 게임 캐릭터로 만들어놨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특수부대에서 익힌 총기와 근접 전투 실력. 여기에 시스템 같은 게 붙는다면 남들보다 훨씬 유리한 출발선일 수 있었다. 강도현은 애초에 위험을 두려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을 이용할 궁리부터 하는 인간이었다.
좋다, 뭘 얻는데.
[임무 완수 시 보상이 지급됩니다. 경험치, 귀환석, 상점 이용 권한이 포함됩니다.]
경험치는 알겠고, 상점도 알겠고.
귀환석. 그건 뭔데.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데 필요한 재화입니다.]
강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니까 나 여기 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거네.
[귀환석 100개를 확보하면 귀환이 가능합니다.]
백 개. 그거 하나에 얼마나 필요한 건데.
[획득 조건은 임무마다 상이합니다.]
또 비공개냐.
[비공개입니다.]
강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조건 자체가 애매하다는 건 결국 시스템도 완벽하게 설계된 게 아니라는 뜻이지.
허점이 있다는 뜻이고. 그럼 내가 그 허점을 파고들면 되는 거고.
규칙 좋아하는 놈들이 규칙을 다 못 만들어놨어.
그럼 재밌어지는데.
강도현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좋다. 해보자 이거.
[특이 개체의 태도가 확인되었습니다.]
뭘 확인했다는 건데.
[각인이 완료되었습니다.]
갑자기 손목에 뜨거운 열기가 스쳤다. 화상 입은 것처럼 확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강도현은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원 안에 십자 모양이 겹쳐진 형태였다.
손톱으로 긁어봤다. 지워지지 않았다.
이건 또 뭔데.
[계약의 표식입니다. 특이 개체를 무림대륙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입니다.]
인도라는 말 참 좋게 쓴다.
압송이라고 하지 그냥.
허공의 흰빛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쩍, 하는 소리가 났다. 검은 균열이 대기실 한쪽에 열렸다. 그 속에서 이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흙냄새 같기도 하고 쇳내 같기도 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잠깐, 나 준비도 안 됐는데.
[전환이 시작됩니다.]
야, 야. 최소한 무기라도 챙겨야지.
[전환 후 배정됩니다.]
뭘 배정한다는 건데. 랜덤으로 뽑는 거야, 이거.
[정답입니다.]
강도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 새끼가 방금 사람 목숨 갈리는 걸 랜덤으로 정한다고 자백했는데.
야, 이거 최소한 확률표라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대답이 없었다.
명천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 새끼가 사람 말 씹네.
말릴 새도 없이 균열이 그를 삼켰다.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다시 하얗게 번졌다. 몸이 뒤집히는 것 같기도 하고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한 감각이 뒤섞였다.
다음 순간 강도현은 눈을 떴다.
낯선 하늘이 보였다. 구름 색이 이상하게 짙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섞인 듯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코끝으로 흙냄새와 풀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몸을 일으켰다. 등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저 멀리 흙길 하나뿐이었다.
새소리도 이상하게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없는 울음소리였다.
여기가 무림대륙이라는 거지.
[무림대륙 진입이 확인되었습니다.]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강도현은 몸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무릎에 묻은 흙을 손으로 대충 쓸어냈다.
좋아, 그럼 이제 내 무기가 뭔지 좀 알려줘봐.
[배정이 진행됩니다.]
두구두구 하는 소리라도 넣어줘야 실감이 나지.
[배정을 시작합니다.]
허공에 회전하는 원형 문양이 나타났다. 안에 여러 글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검, 도, 창, 권법, 장법, 그리고 마지막에 낯선 단어 하나가 섞여 있었다.
총기.
강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건 또 왜 저기 껴 있는데.
원이 점점 느려졌다. 강도현의 눈이 그 단어에 고정됐다.
야, 저거 잘못 들어간 거 아니냐.
명천아, 저 총기라는 글자 좀 빼줘봐.
대답은 없었다.
이 새끼 또 씹네.
원이 멈췄다. 화살표가 정확히 '총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강도현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검도 아니고, 도도 아니고, 창도 아니고.
권법도 아니고, 장법도 아니고.
하필 저거냐.
야, 명천아. 이거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