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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공간이 넓어졌다. 천장이 높아지고, 발광 이끼 대신 벽면 곳곳에 박힌 광석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광석은 푸르스름한 빛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결정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건 육각형으로 갈라져 있었고, 어떤 건 그냥 뭉텅뭉텅한 원석 그대로였다. 이런 걸 감상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저쪽 세계에도 비슷한 광물이 있었다. 그때는 저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밟고 지나갔었는데. 그 빛 아래,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이 흩어져 있었고, 구석에는 어른 몸통 두 배쯤 되는 덩치가 웅크리고 있었다. 호브고블린이었다. 저쪽 세계에서 몇 번 상대해본 적 있는 종류였다. 몽둥이 대신 녹슨 도끼를 들고 있었고, 피부는 진흙빛에 가까웠다. 도끼는 날이 이가 빠져 있었는데, 그래도 저 덩치가 휘두르면 이가 빠진 것도 문제가 안 될 거였다. 나는 벽에 몸을 붙이고 다시 감지 스킬로 배치를 확인했다. 여섯, 아니 일곱. 정면으로 부딪히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였다. 숫자를 세면서 동선을 그려봤다. 왼쪽부터 정리하면 오른쪽 놈들이 몰릴 거고, 오른쪽부터 정리하면 왼쪽이 몰린다. 어느 쪽이든 결국 몰린다는 소리였다. 몰리는 게 나쁜 건 아니었다. 한 놈씩 상대하는 것보다, 좁은 자리에서 뭉쳐 있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오히려 편할 때가 있었다. 문제는 그 뭉친 놈들 사이에 호브고블린이 끼어드는 순간이었다. 그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고블린을 먹은 뒤로 몸이 뭔가 달라져 있었다. 감지 스킬을 켜는데 드는 소모가 이전보다 확실히 적었다. 마치 스위치를 누르는 손끝의 힘이 반쯤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접선을 시험해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에서 공기가 접히는 느낌이 훨씬 매끄러웠다. 예전에는 접선을 쓸 때마다 뭔가 뻑뻑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웠다. 먹은 만큼 강해진다. 확신이 서자 오히려 몸이 가벼워졌다. 이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섰지만, 일단 지금 이 순간에는 좋은 소식이었다. 눈앞에 일곱이나 있으니까. 나는 가장 바깥쪽에 서 있는 고블린 하나를 표적으로 골랐다. 소리 없이 접선을 썼다. 픽. 목을 꺾는 손맛이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 뼈와 근육 사이 그 얇은 틈을 정확히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손이 알아서 그 틈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오탈자가 계속 나오는 건 손이 흥분해서인지도 몰랐다. 아니, 오탈자를 낼 만큼 손에 신경이 몰려 있다는 건 지금 상황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머지들이 반응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소리는 여러 겹으로 겹쳐서 울렸다. 동굴이라 그런지 원래 소리보다 몇 배는 크게 들렸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 소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왼쪽 것의 몽둥이를 맨손으로 부러뜨리고, 오른쪽 것의 목을 팔로 감아 꺾었다. 몸이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반응했다. 마치 근육 하나하나가 조금씩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왼쪽 놈의 몽둥이가 부러지는 소리는 나무가 아니라 뭔가 더 단단한 걸 부러뜨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안에 뭐가 박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남은 놈들의 움직임이 눈에 다 보였다. 예전 같으면 저 움직임이 그냥 뭉개져서 보였을 텐데, 지금은 팔이 어느 방향으로 꺾이는지, 다리가 어느 각도로 디뎌지는지까지 다 잡혔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저것들 셋한테 죽을 뻔했던 내가, 지금은 여섯을 상대하면서도 숨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섯 번째 놈이 도망치려는 틈새를 보였다. 도망치는 놈을 쫓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쫓다 보면 놓치는 경우가 있고, 놓친 놈이 다른 놈들을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발밑에 굴러다니던 돌을 하나 집어 던졌다. 정확히 뒤통수에 맞았다. 놈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 틈에 거리를 좁혀 목을 꺾었다. 호브고블린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도끼를 크게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몸집이 크고 힘도 셌지만, 속도는 오히려 앞의 것들보다 느렸다. 저쪽 세계에서도 그랬다. 덩치가 크면 크게, 느리게 온다. 문제는 그 느린 한 번에 맞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거였다. 나는 그 도끼를 피하지 않고, 손으로 도끼날을 잡았다. 쩌엉.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살이 갈라지는 감각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짓을 하다가 손가락이 몇 개는 날아갔을 거였다. 호브고블린의 눈이 커졌다. 저쪽 세계 몬스터도 이 눈빛은 똑같았다. 두려움을 처음 느끼는 순간의 그 눈빛. 몸집만 크고 힘만 센 놈들이 흔히 짓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항상 강자였던 놈이, 처음으로 약자가 되는 순간의 그 얼굴. 끝은 빠르게 왔다. 나는 공간 한가운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여섯 마리, 아니 첫 번째까지 합쳐서 일곱.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걸 상대한 건 오랜만이었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끝은 계속 저릿저릿했다. 아까 도끼날을 잡았던 그 손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급하게 먹지 않았다. 저쪽 세계의 규칙을 다시 떠올렸다. 신선함이 중요하다. 그리고 한 번에 너무 많이 흡수하면 위험하다. 이건 몸으로 배운 규칙이었다. 저쪽 세계에서 규칙을 어기고 한꺼번에 여러 개를 먹은 놈들을 본 적이 있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몸이 안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다가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걸 두 번쯤 봤다. 나는 사체 세 개를 골라 순서대로 먹었다. 순서를 고르는 것도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순서, 그리고 몸집이 큰 순서. 몸속에서 아까보다 더 뜨거운 감각이 퍼졌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가 몸 안에서 다시 조립되는 느낌. 뼈 마디마디가 살짝 늘어나다가 다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이질적이었다. 세 번째 사체를 다 비웠을 때, 손끝에서 미세한 빛이 일었다. 접선 스킬을 쓸 때 나던 그 파열음이, 이번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났다. 픽. 나는 놀라서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반응한 거였다. 마치 스킬이 저절로 숙련되는 것 같은 느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봤다. 다시 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전엔 분명히 뭔가 터졌다. 손끝이 아니라 어깨 쪽에서 나는 느낌도 들었다. 위치를 특정하기가 힘들었다. 이거 위험하다. 힘이 늘어나는 건 좋지만, 통제가 안 되면 다른 문제였다. 이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폭주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이 잘 안 갔다. 아니, 상상이 갔다. 저쪽 세계에서 몬스터가 폭주하는 걸 몇 번 봤으니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살이 터지고, 뼈가 뒤틀리고, 결국 자기 살에 자기가 파묻히는 꼴을 봤었다. 그게 여기서, 이 몸으로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각을 다잡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었다. 셋을 세고, 다시 셋을 세고. 저쪽 세계에서 감정이 크게 흔들릴 때 쓰던 방법이었다. 별 것 아닌 방법인데도 손끝의 저릿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그때, 저 멀리서 낮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우웅. 처음에는 던전 안쪽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 던전 안에도 뭔가 기계 장치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위쪽, 내가 들어왔던 입구 방향에서. 나는 감지 스킬을 다시 켰다. 소모가 적어진 걸 다시 확인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람 하나의 기척,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작고 규칙적인 기계의 진동. 드론이었다. 입구 쪽 경비가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순찰 경로가 바뀌었거나.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 던전이 완전히 방치된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이 안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누군가가 지금 이 방향으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입구까지는 지금 걸어서 오 분 거리. 그런데 드론은 이미 통로 안쪽까지 진입한 것 같았다. 드론 속도를 생각하면 오 분보다 훨씬 빨리 여기 도착할 거였다. 만약 저게 카메라를 켜고 있다면, 이 공간에 흩어진 고블린 사체들과 나를 그대로 찍어버릴 거다. 사체 네 개가 아직 바닥에 널려 있었다. 사람이 이걸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신고, 조사, 그리고 나에 대한 질문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괜찮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나는 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접선을 준비했다. 손끝에 감각을 모으는데,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훨씬 빠르고 선명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뭔가가 대기하고 있는 느낌. 방금 전 저절로 터졌던 그 감각이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번엔 제어가 될지 확신이 안 섰다. 부우웅. 소리가 훨씬 커졌다. 이제는 통로 벽을 타고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몸을 최대한 벽에 붙였다. 광석에서 나오는 빛이 오히려 방해가 됐다. 이 빛 아래에서는 숨을 곳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빛이 번쩍였다. 드론의 조명이 나를 정면으로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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