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2시간의 감정사

2화

다음날 아침, 나는 이상한 걸 발견했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벗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제 그 유리조각이 손끝에 닿았다. 꺼내서 보는데, 조각 위에 뭔가 글자 같은 게 떠 있었다. [등급: 미확인 / 속성: 균열 파편 / 위험도: ???] 뭐지? 닦아도 안 지워지고, 흔들어도 안 없어졌다. 심지어 입김을 불어봤다. 안 지워졌다. 혀로 핥아볼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관뒀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 조각을 한참 노려봤다. 분명 어제 편의점 앞에서 하늬랑 같이 발견한 그냥 유리조각이었는데. 누가 매직으로 써놓은 것도 아니고, 조각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글자가 떠 있었다. "야, 하늬야. 이거 봐봐." 방을 나서기 전에 급하게 하늬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쯤 울리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뭔데, 아침부터." "이 유리조각에 이상한 글자가 떠 있어. 등급, 속성, 위험도, 뭐 이런 게." "환각이겠지, 잠 좀 자." 전화가 뚝 끊겼다. 나름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 환각. 그래, 환각이겠지. 어제 컵라면 국물 마신 게 문제였나. 나트륨 과다 섭취로 뇌가 오작동하는 병명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학교 가는 길에 계속 이상한 게 보였다. 버스 정류장 옆 가로수를 보면 [수령: 32년 / 상태: 건강], 그 밑에서 볼일 보는 강아지를 보면 [나이: 3세 / 성격: 온순], 심지어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를 보다가 [혈압: 다소 높음]이 떠서 황급히 눈을 돌렸다. 이건 진짜 초상권, 아니 신체 정보권 침해 아닌가 싶었다. 뭔지 몰라도 정보가 그냥 눈에 들어왔다. 마치 게임 감정 창이 켜진 것처럼. 근데 나는 이 게임을 시작한 적도 없고 튜토리얼도 안 받았는데 왜 스킬이 켜져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수기 22:31,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니 그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어, 발람은 나귀 타고 다녔는데 나는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게 차이점이겠다. 그리고 발람은 정신 차려보니 천사가 보였다는데 나는 정신 차려보니 강아지 나이가 보이는 거니까, 스케일이 확실히 다르긴 하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는데, 옆자리에 유안이가 앉았다. "어, 도훈아. 좋은 아침." "어, 좋은 아침." 평소처럼 웃으면서 가방을 내려놓는 유안이를 보고 나도 그냥 웃어줬다.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화요일 아침이었다. 근데 유안이 얼굴 위로 뭔가 뜨는 게 느껴졌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박유안 / 성별: 남 / 나이: 20 / 이세계 소환 예정: 72시간 후 / 소환 결과: 사망] 뭐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안경도 안 쓰는데 시야가 흐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봤다. 똑같았다. [박유안 / 이세계 소환 예정: 72시간 후 / 소환 결과: 사망] 장난인가. 누가 몰래 카메라라도 설치한 건가, 하고 강의실 천장을 둘러봤지만 카메라 같은 건 없었다. 환각이라던 하늬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을 찾는 게 얼마나 뻔한 클리셰인지 알면서도, 나는 속으로 하늘을 향해 짧게 기도했다. 제발 이거 환각이게 해주세요, 아멘. "도훈아, 뭐 봐? 얼굴 왜 그래." 유안이가 나를 이상하게 보며 물었다. "아, 아니. 어제 잠을 못 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평범한 대학생은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손이 떨렸다. 필기하려고 펜을 잡았는데 글씨가 지렁이처럼 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세면대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새벽에 밤새 게임한 사람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싶을 만큼. 환각이다. 그냥 환각이다. 근데 왜 이렇게 구체적이지. 환각이면 보통 흐릿하고 몽롱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폰트까지 명확한 게 이상했다. [요한계시록 1:19,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이후에 될 일을 기록하라] 기록하라니, 나는 그냥 이 능력 폐기하고 싶은데. 환불 정책도 없이 이런 걸 강제로 지급하는 게 어디 있나. 다시 밖으로 나가서 아무 사물이나 감정해봤다. [화장실 손잡이 / 재질: 스테인리스 / 상태: 정상] 제대로 작동한다. 유리조각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면대도 감정해봤다. [세면대 / 제조사: 불명 / 상태: 정상] 심지어 화장실 휴지도 감정해봤다. [화장지 / 남은 양: 약 60%] 쓸데없이 정밀했다. 이 정도면 국가정보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수준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유안이 정보도 진짜라는 소리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는 표현, 이번엔 진심으로 실감났다. 소름이 팔뚝까지 쭈뼛하게 올라왔다. "야, 도훈아. 표정이 왜 그래." 점심시간에 하늬가 나를 붙잡고 물었다. 학식 줄에 서 있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아예 줄에서 빼내서 구석 테이블로 데려갔다. "하늬야, 나 진짜 이상한 걸 봤어." 하늬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유리조각, 정보 창, 가로수와 강아지, 그리고 유안이 얘기까지. 숨도 안 쉬고 쏟아냈던 것 같다. 말하는 동안 하늬는 밥도 안 먹고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늬 표정이 순간 굳었다. "유안이가... 72시간 후에 이세계로 소환된다고?" "그리고 죽는다고." 하늬가 잠깐 말을 잃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멈춘 채로 한참 있었다. "그거 진짜야? 확실해?" "모르지, 나도. 근데 다른 정보들은 다 맞았어." 하늬가 팔짱을 끼고 한참 고민했다. 테이블에 앉은 다른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일단 유안이한테는 말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하늬는 내 말을 믿어줬다. 뭐 이렇게 순순히 믿나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보통 이런 소리를 하면 "야, 너 미쳤냐"부터 나와야 정상인데, 하늬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는데, 당시엔 그냥 하늬가 워낙 나를 믿어주는 좋은 친구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그럼 우리 뭐부터 해야 돼?" "일단...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다시 유안이를 감정해봤다. 멀리서 친구들이랑 웃으면서 얘기하는 유안이 뒷모습을 보면서 눈에 힘을 줬다. [소환 예정: 71시간 22분 후] "71시간 22분." "됐다, 시작하자." 하늬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결의에 찬, 낯선 눈빛이었다. 뭐지, 이 반응은. 근데 그 순간엔 그냥 하늬가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친구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니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넘어갔다. [전도서 9:12, 인생도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유안아, 넌 지금 니 시기가 71시간 뒤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밥 먹는 척 웃는 척 하려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유안이가 갑자기 나한테 다가와서 말했다. "도훈아, 나 오늘 시간 되면 게임방 갈래?" "어, 갈까." 평소처럼 웃는 유안이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저 순진한 표정 뒤에 72시간짜리 카운트다운이 걸려 있다는 걸 아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이 애가 71시간 뒤에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 못 하는 게, 뭔가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한테 웃으면서 다음 주에 놀러 가자고 말하는 기분이랄까. 근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친구 하나 잃으면 새로 사귀어야 하는데, 그게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새 친구 사귀려면 이름 외우고, 서로 관심사 맞춰보고, 어색한 텀 지나야 하고,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데. 그런 이유로 나는 결심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이세계 소환이든 뭐든. 게임방으로 가는 길에 하늬가 문자를 보냈다. [일단 계획 세워보자. 72시간 다 되기 전에.] 답장을 하려고 폰을 꺼내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자음 하나 겹쳐 치고 지우고 다시 치고, 그 짧은 사이에도 마음이 급했다. 답장을 하려는데, 하늬 문자 아래에 뭔가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알림: 감정 대상의 위험도가 상승했습니다.] 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또 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진하게, 마치 에어컨 바람이 등 뒤에서 직접 쏟아지는 것처럼. 다시 유안이를 감정해봤다. 옆에서 게임방 간판을 가리키며 신나게 뭐라고 떠드는 유안이를,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눈으로만 훑었다. [소환 예정: 71시간 15분 후 / 위험도: 상승 중] 시한이 줄어드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진 느낌이었다. 7분 사이에 뭔가 바뀐 게 분명했다. 뭔가, 상황이 이미 내 예상보다 급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게임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유안이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웃음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는 웃음인지 세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세다가는 진짜로 울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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