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2시간의 감정사

4화

"초, 초능력자는 아니고..." 하늬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럼 뭐야, 방금 그거." 유안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빛이 완전히 '나 이거 안 넘어가' 모드였다. 나는 머리를 싸매쥐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유안이가 안 놀랄까. 아니, 애초에 안 놀라는 게 가능한 상황인가. 검은 그림자 괴물이 편의점 앞에서 튀어나와서 사람을 덮치려다가 하늬 발차기 한 번에 훅 꺾여서 사라졌는데, 이걸 어떻게 정상적으로 설명하냔 말이다. "어, 그게, 하늬 걔가... 특수부대 출신이야." 순간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속으로 절규했다. 아니 특수부대가 뭐야, 국방부에서 소송 걸겠다. 하늬가 나를 확 쳐다봤다. 눈빛이 '너 뭐라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눈빛 뒤에 숨은 텍스트를 굳이 번역하면 대략 '야 인마 나 대학생이야 무슨 특수부대야'였을 거다. "특, 특수부대?" 유안이가 되물었다. "어, 어. 국가 소속. 극비 임무 수행 중이라 말 못 하는 거였어." 나는 즉석에서 설정을 지어냈다. 평범한 대학생이 되려면 위기 대처 능력도 필요한 법이다. 이 순간 내 머릿속은 무슨 드라마 작가 지망생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국가, 극비, 임무. 세 단어만 있으면 어떤 개소리도 그럴싸해 보인다는 걸 이 나이 먹고 처음 깨달았다. "그, 그래서 방금 그 검은 괴물도 국가 기밀 실험체 같은 거였고?" 유안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 먹혔다. 이게 먹힌다고? 나는 순간 내 자신이 무서워졌다. 이렇게 즉석에서 뻥을 잘 치는 인간이었나, 나는. "맞아, 맞아. 실험체야. 실험체가 탈출해서 하늬가 처리한 거야." 하늬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극비야, 진짜 말하면 안 돼." 말하면서도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아마 속으로 '이 새끼가 뭔 소리를 지어내는 거야' 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다니엘 2:47,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은밀한 걸 나타내랬더니 특수부대라는 뻥으로 다시 은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 지금 되게 창의적인 신도 아닐까. 아니면 그냥 사기꾼 기질이 있는 걸지도. 유안이가 한참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근데 진짜 멋있다, 서하늬 너." 눈에서 반짝반짝 존경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돌 팬미팅 온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하늬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그래... 고마워." 웃는 얼굴에 '나 지금 뭔 죄를 짓고 있나' 하는 표정이 살짝 섞여 있었다. 일단 위기는 넘겼다. 임기응변이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앞으로 취업 자기소개서 쓸 때도 이 능력 써먹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곧바로 지웠다. 이건 좀 다른 종류의 능력이니까. 유안이를 보내고 나서 하늬랑 나만 남았다.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하늬가 다 마신 캔커피를 뱅글뱅글 돌렸다. "야, 특수부대는 뭐야, 갑자기." 하늬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뭐, 순간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말한 거지. 먹혔잖아." "먹혀서 다행이지, 안 먹혔으면 어쩔 뻔했어." "안 먹혔으면... 뭐, 다른 뻥 쳤겠지." "너 이 새끼 진짜 재능 있다." "칭찬이야, 욕이야?" "몰라, 둘 다." 하늬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캔커피 뚜껑을 손톱으로 딸그락딸그락 두드리면서 하늬가 중얼거렸다. "진짜 조상님들 볼 낯이 없다. 700년 지켜온 은신술 가문 후예가 편의점 앞에서 발차기 한 번으로 정체 들킬 뻔했으니." 700년이라니, 이 애가 700살은 아닐 텐데. "700년 은신술 가문이 뭐야, 진짜." "말하자면 길어." "그럼 짧게 말해봐."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까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유리조각이랑 소환 카운트다운이랑 검은 그림자 괴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하늬가 정확히 뭐 하는 애인지 물을 여유조차 없었다. 하늬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그림자를 다루는 일을 해왔어.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뭔가를 처리하는 일." "그림자 요원 같은 거야?" "비슷해. 근데 지금은 그런 일보다..." 하늬가 말을 흐렸다. 캔커피를 만지던 손이 잠깐 멈췄다. "지금은 뭐?" "아니야, 아무것도."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눈치였다. 표정에서 뭔가 삼키는 게 보였는데, 캐물으려다가 그냥 참았다. 사람 사이에도 예의가 있는 법이니까. 오늘 처음 알게 된 700년 가문 이야기를 한 번에 다 캐물으면 그건 좀 무례한 짓 같았다. 근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하늬야, 그보다 유안이 얘기 좀 하자. 시간이 계속 줄고 있어." 나는 다시 유안이를 떠올리며 감정을 해봤다. 눈을 감고 유안이 얼굴을 떠올리자, 눈앞에 익숙한 텍스트가 떠올랐다. [박유안 / 소환 예정: 69시간 41분 후] 69시간. 하루 반나절 정도가 이미 사라진 셈이었다. 처음 감정했을 때는 71시간이 넘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줄었나. 시간이 물처럼 흘러간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 나는 순간이 있을까. "우리 뭐부터 해야 되지." 하늬가 진지하게 물었다. 캔커피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는 자세가, 아까 발차기 날릴 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일단 그 소환이 왜 일어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하늬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 쪽에 이런 거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게 누군데?" "할머니." 하늬 할머니라니, 그것도 대단한 존재일 것 같았다. 700년 은신술 가문의 할머니면 대체 어떤 사람일까.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무협 영화에 나오는 백발 노고수를 그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알아?" "몰라, 근데 물어봐야지. 지금 시간이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시간이 없다. 69시간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계속 깜빡거렸다. 배터리 부족 알림처럼.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그 유리조각을 다시 꺼내봤다. 방 불을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채로, 유리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등급: 미확인 / 속성: 균열 파편 / 위험도: ???] 여전히 똑같은 정보였다. 뭔가 규칙이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게임이면 진작 인터넷에 공략 검색했을 텐데, 이건 검색해도 안 나올 게 뻔했다. '유리조각 균열 파편 위험도 물음표 뜻' 이렇게 검색하면 무슨 결과가 나올까, 아무것도 안 나오겠지. 그때 갑자기 문자가 왔다. 하늬였다. [내일 아침에 할머니 댁 가자. 지방이라 좀 걸려.] [알겠어. 근데 내일이면 몇 시간 남는 거야?] 계산해보니 대략 45시간 정도 남는 셈이었다. 적지 않은데, 또 넉넉하지도 않은 시간. 45시간이면 이틀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편도체 몇 년 치를 소모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자, 내일 새벽에 출발하자.] 하늬 문자를 보고 침대에 누웠다. 근데 잠이 안 왔다. 계속 유안이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게임방에서 웃던 얼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으며 놀란 얼굴. "어, 어. 극비야" 하고 하늬가 얼버무릴 때 옆에서 진지하게 고개 끄덕이던 얼굴도. 그 얼굴이 71시간 뒤에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69시간이니까, 조금 더 줄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나. 학교 다닐 때 시험 D-day 카운트다운은 이거보다 훨씬 여유로웠던 것 같은데. 코끝이 찡해졌다. 농담이다. 일단 이건 그냥 친구니까 구해야 하는 거지, 뭐 대단한 감정은 아니다. 진짜다. 나는 지금 아무 감정도 없다. 없는 척하는 거다. 없는 척하는 걸 티 안 나게 하는 게 관건이다. [전도서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노력한 대가를 얻을 것임이라] 하늬랑 둘이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성경 말씀도 이렇게 대놓고 편들어주는데, 혼자 낑낑댈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근데 뭔가, 이번 일이 생각보다 훨씬 큰 문제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 위험도라는 글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미확인, 물음표 세 개. 이거 게임으로 치면 '히든 보스급 경고 표시' 아닌가. 다음 날 새벽, 하늬 차를 타고 지방으로 향했다. 차 안은 조용했고, 하늬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하품을 몇 번이나 참았다. "몇 시간 잤어?" 물으니까 하늬가 "몰라, 안 잤나 봐" 하고 대충 답했다. 창밖으로 해가 뜨는 걸 보며 나는 유안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뭐해?] [나 그냥 학교 왔지, 너는 어디야?] [친구 할머니 뵈러 지방 왔어.] [오, 착하다ㅋㅋ 잘 다녀와.] 평소처럼 밝은 문자였다. 이 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자기가 뭔가 거대한 카운트다운의 주인공이 됐다는 걸, 이 문자 하나로는 절대 알 수 없겠지. 학교 강의실에서 졸고 있을 유안이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속이 쓰렸다. 하늬 차가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도로 표지판이 휙휙 지나가고, 라디오에서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조수석에 앉아서 나는 계속 유안이를 감정했다. [박유안 / 소환 예정: 44시간 12분 후 / 위험도: 상승 중] 위험도가 계속 오르고 있다. 어제는 그냥 물음표였는데, 오늘은 '상승 중'이라는 텍스트가 새로 붙었다. 뭔가 카운트다운이 그냥 시간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위험 자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뜻 같았다. 마치 배달 앱에서 '조리 중'이던 게 갑자기 '픽업 지연'으로 바뀌는 느낌이랄까. 좋은 신호는 절대 아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늬 할머니가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알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44시간, 43시간, 계속 줄어드는 숫자가 눈꺼풀 안쪽에서도 어른거렸다. 하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할머니 좀 무서우실 수도 있어. 미리 각오해." "어, 얼마나?" "글쎄, 나도 마지막 뵌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자주 안 뵈어?" "어릴 때 잠깐, 그 뒤로는... 좀." 하늬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뭔가 사연이 더 있는 눈치였는데, 물어볼 틈도 없이 차는 고속도로 출구로 빠지고 있었다. 저 멀리 산자락 아래로 낡은 한옥 지붕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그 700년 은신술 가문의 뿌리인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