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반경 1미터의 구원자

2화

지하 3구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언제나 서늘했다. 낮에도 볕 한 줌 들지 않는 구조라 그런지, 여름이든 겨울이든 이 계단만 밟으면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형광등 몇 개가 깜빡이는 통로를 지나며 나는 결계 감지기를 흔들어보았는데, 화면에는 아무런 이상 신호도 뜨지 않았다. 반응 수치는 0에 가까운 숫자만 깜빡였고, 배터리 부족 경고가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조용하네. 이럴 거면 그냥 순찰 로그에 정상이라고 도장이나 찍고 올라가면 안 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C랭크 순찰이라는 게 이런 식이었다. 특별한 사건 없이 통로를 한 바퀴 돌고, 감지기에 이상이 없으면 보고서 한 줄 쓰고 퇴근하는, 딱 그 정도의 일. 월급 받는 값어치가 있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고 없는 날이 최고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던 중,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강도경." 돌아보니 이현우가 팔짱을 낀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늘 그렇듯 몇 명의 동급생이 따라붙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이현우의 눈치를 살피며 실실 웃는 표정이었다. 이현우는 명문 이씨 가문 차남으로, 이급 구마사 자격을 이미 취득한 우등생이었다. 나보다 두 학년 아래였지만 능력만큼은 압도적이었고, 학원 안에서 그의 위세는 교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였다. 실전 시험에서 상급 저주를 세 번 만에 정화했다는 소문은 이미 전설처럼 퍼져 있었고, 나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나랑 같은 학년이었으면 아마 나는 이미 자퇴했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C랭크 순찰이라니, 넌 참 어울리는 임무만 받는구나."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감지기를 다시 확인했다. 화면은 여전히 조용했다. "대답도 안 하네. 하긴, 무효화 능력이라는 게 대체 뭐가 쓸모 있는지 나도 궁금하긴 해." 그의 말에 뒤따라온 동급생 몇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명은 아예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킬킬거렸고, 다른 하나는 "그러게, 뭐라도 무효화시켜 보든가" 하며 거들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 자식은 참 성실하게 사람을 놀리네. 시비 걸 시간에 순찰이나 도와주면 서로 편할 텐데.' 사실 이런 조롱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라 이제는 별다른 감정도 들지 않았다. 처음 몇 달은 자존심도 상하고 밤에 이불 킥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배경음악처럼 흘려듣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무효화 능력이라는 게 화려한 공격형 각성자들 눈에는 확실히 시시해 보일 만했다. 나도 안다. 나조차도 가끔은 이 능력으로 뭘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통로를 걷는데, 감지기가 갑자기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손바닥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감각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미약한 저주 반응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워낙 작은 수치라 순찰 규정상 보고할 필요조차 없는 정도였다. 나는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습관처럼 반응이 감지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은 이미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 직업병 같은 습관이 언제 생겼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놓쳤다가 나중에 큰 사고로 번지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방향 끝에는 낡은 철문이 하나 있었다. 표면은 녹이 슬어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고, 봉인구역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워낙 오래된 시설이라 관리가 소홀했는지, 문틈으로 희미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가까이 대보니 마치 냉장고 문을 살짝 열어놓은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여긴 원래 폐쇄된 구역인데.' 나는 감지기를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미약한 반응만 표시될 뿐이었다. 이현우와 동급생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며 다른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고민한 뒤, 나는 철문을 밀어보았다. 놀랍게도 문은 쉽게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매끄럽게, 마치 누군가 최근까지 이 문을 드나든 것처럼.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신경에 걸렸지만, 나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낡은 배관과 먼지 쌓인 상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고, 오래전 폐기된 실험 도구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들이 벽을 따라 늘어지며 이상하게 사람 형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이거 뭐야.' 감지기의 화면이 갑자기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고, 수치는 순식간에 최대치를 넘어섰다. 삐, 삐, 삐— 경고음이 좁은 공간 안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감지기를 손에 꽉 쥐며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살피는데, 그 순간 벽 쪽 그늘 속에서 뭔가가 미약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처음엔 쥐나 벌레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낡은 시설이라면 그런 게 살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손전등 불빛이 그쪽을 비추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늘 속에 있는 건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사슬에 묶인 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였는데, 가느다란 팔다리에 얼기설기 감긴 낡은 사슬이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이런 곳에 사람이 있어.' 나는 감지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밑에서 부스러지는 먼지와 잔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소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감지기가 표시하는 저주 수치는 이미 계기판을 벗어난 상태였고, 나는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이건 삼급이니 사급이니 하는 수준이 아니잖아.' 마치 덤프트럭이 돌멩이를 짓누르듯,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공기 자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졌고, 발밑이 진흙에 빠진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초점이 흐릿했다. 마치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깨진 유리구슬 같은 눈이었다. "거기, 누구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을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순간 등 뒤에서 철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손잡이를 잡아당겨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갇혔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감지기의 경고음은 더 커졌고, 화면 전체가 붉게 물들며 깜빡였다. 쿠구구구구—. 건물 전체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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