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굴 안은 예상보다 넓었다.
천장은 낮았지만 좌우로는 사람 열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트여 있었다.
돌바닥에는 물이 얕게 흐르고 있었다.
도윤의 발소리가 벽에 부딧혀 낮게 울렸다.
발을 뗄 때마다 물이 찰박거렸다.
차가운 물기가 신발 안으로 스며들었다.
도윤은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소리를 줄이려는 생각이었지만, 물소리는 어쩔 수 없이 벽을 타고 퍼져나갔다.
굴 입구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은 이제 거의 닿지 않았다.
등 뒤로 흐릿한 빛의 조각만 남아 있었다.
그 조각도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작아졌다.
어둠에 눈이 익자 조금씩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돌기둥.
갈라진 벽.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뼈들.
작은 짐승의 것 같기도 했고, 사람의 것 같기도 했다.
도윤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뼈들은 한곳에 모여 있지 않았다.
여기 몇 개, 저기 몇 개.
마치 누군가가 먹고 남은 것을 아무 데나 던져둔 것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부러진 채로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도윤은 그 자국의 크기를 가늠하지 않으려 애썼다.
배 속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그 소리가 벽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마치 배 속에 또 다른 무언가가 들어앉아 스스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윤은 배를 한 번 눌러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리는 여전히 났다.
웅—
귀 안쪽에서 다시 그 울림이 지나갔다.
어젯밤 마당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때는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조금 더 길게 남았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돌의 냉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서늘함은 돌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 순간, 앞쪽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작고, 빠르고, 여러 개였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자박, 자박, 발끝으로 뛰는 듯한 걸음이었다.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 가볍고 짧았다.
도윤은 몸을 낮췄다.
등을 벽에 붙이고 숨을 죄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형체 셋이 나타났다.
무릎 정도 높이의 키.
초록빛 피부.
뾰족한 귀.
손에는 조잡한 돌칼을 쥐고 있었다.
고블린이었다.
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 그대로였다.
곳간굴 안쪽에 소인족 무리가 산다는 말.
아이들 겁주는 이야기라고 여겼었다.
어른들이 술자리에서 흘리는 허풍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짐승이겠지, 하고만 생각했다.
산돼지나 사슴, 아니면 곰 같은 것.
뜯어먹을 수 있는 살덩이가 있는 무언가.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사람의 형상을 한, 말을 할 줄 아는 존재였다.
움직임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서로를 향해 눈짓을 하고,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짐승의 몸짓이 아니었다.
도윤의 배 속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전보다 더 크게, 더 또렷하게.
그 소리에 고블린 세 마리가 동시에 몸을 낮췄다.
귀를 쫑긋 세우고 도윤 쪽을 노려보았다.
셋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모였다.
"자, 잠깐."
도윤은 손을 들어 보였다.
말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바닥을 펴 보이는 것,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통하던 몸짓이었다.
여기서도 통할 거라 믿을 근거는 없었다.
고블린들은 그 손짓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더 낮췄다.
돌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고블린 하나가 먼저 뛰어올랐다.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도윤의 눈이 그 궤적을 겨우 따라갔다.
돌칼이 도윤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도윤은 몸을 틀었다.
생각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칼끝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도윤의 손이 그 고블린의 팔을 잡았다.
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블린이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높고 날카로운 비명이 굴 안을 가득 채웠다.
도윤 자신도 놀랐다.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붙잡았을 뿐인데, 팔이 그렇게 쉽게 부러졌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쥔 것 같았다.
손끝에 남은 감각이 낯설었다.
사람의 팔을 잡았을 때의 감각과는 달랐다.
너무 쉬웠다.
너무 가벼웠다.
나머지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도윤은 뒤로 물러서며 한쪽 발을 내질렀다.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판단은 그 뒤를 따라왔다.
발끝이 고블린의 몸통에 닿았다.
그 작은 몸이 통째로 붕 떠서 벽에 부딪혔다.
돌벽이 움푹 들어갔다.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고블린은 그대로 늘어졌다.
움직이지 않았다.
남은 한 마리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
동료 둘이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몸이 굳은 듯했다.
돌칼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그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거리는 충분했다.
움직임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붙잡지 않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감각 때문이었다.
벽에 부딪혀 늘어진 고블린에게서 옅은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도윤의 코가 그 냄새를 따라갔다.
비릿하고, 미묘하게 달았다.
사람의 피 냄새와도, 짐승의 피 냄새와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를 구분할 겨를이 없었다.
코끝이 그 냄새에 붙들려 있었다.
배 속의 소리가 더 커졌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목구멍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건 먹이인가.
그 생각이 들자마자 도윤은 스스로 놀랐다.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는 것에 놀랐다.
지금 자신이 방금 죽인 게, 혹은 죽이려 했던 게, 말을 할 줄 아는 존재였다.
짐승이 아니었다.
눈짓을 하고, 신호를 주고받던 존재였다.
"이건, 아니지."
도윤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 않게 낮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그 작은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코는 여전히 피 냄새를 쫓고 있었다.
두 개의 감각이 동시에 그를 붙들고 있었다.
하나는 이건 잘못됐다는 감각.
다른 하나는 저것을 삼키고 싶다는 감각.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으로 겨우 발을 붙잡아 두었다.
남은 한 마리 고블린이 뒷걸음질치며 무언가를 외쳤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언어라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신호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소리에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다.
동료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신호가 굴 안쪽으로 퍼져나갔다.
벽을 타고, 어둠을 타고, 점점 더 멀리까지.
멀리서 더 많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 이상.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하던 발소리가 점점 겹치기 시작했다.
자박거리는 소리들이 하나의 두터운 울림으로 뭉쳐졌다.
도윤은 벽에 손을 짚었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목 안쪽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배고픔이, 지금은 다른 감각과 섞이고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은 방금 고블린 둘을 아무렇지 않게 쓰러뜨린 몸이었다.
그런데도.
하지만 벽을 짚은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손바닥에 닿은 돌의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안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냉기였다.
도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는 아직 가까웠다.
등 뒤로 흐릿한 빛의 조각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지금 나가면 안전할 수 있었다.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하면, 저 빛의 조각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배 속에서, 여전히 그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입안의 침도 여전히 고여 있었다.
쓰러진 고블린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아직도 코끝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먹이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두려움인지, 갈망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도윤은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발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발소리는 이제 하나의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파도의 앞쪽에서, 붉은 빛 두 개가 어둠 속에 나타났다.
눈이었다.
사람의 눈보다 크고, 짐승의 눈보다 차가운.
도윤을 향해 정확히 고정된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