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뱀파이어, 등록하겠습니다

4화

하룻밤이 지나고, 약속한 아침이 찾아왔다. 이도윤은 부서진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부서진 파티션 사이로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렸다. 바닥에는 서류철이 흩어져 있었고, 모니터 하나는 완전히 박살나 화면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야근 사무실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재난 현장처럼 변해 있었다. 황가린은 폐허가 된 사무실 한복판에 서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각성자는 발견 즉시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수백 번은 겪어본 사람처럼. "등록이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이도윤이 물었다. 목이 잠긴 듯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국립이능인생활지원센터에 신고하고, 관리 대상으로 편입되는 거예요." 황가린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규정을 나열했다. "병원 진료 금지." "...네?" 이도윤의 눈썹이 좁아졌다. "병원에서 검사받으면 발현체가 감지돼요. 등록 전에 발견되면 강제 격리 대상이 됩니다." 이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병원도 못 가?' 살면서 아파도 병원 못 가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 건강검진도 위험해요." 황가린이 덧붙였다. "미등록 상태로 발현체가 노출되면, 즉시 신병이 확보돼요." "신병 확보라는 게..." 이도윤이 되물었다. 말끝이 저절로 떨려 나왔다. "강제 격리예요." 황가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쉽게 말해 잡혀간다는 뜻입니다." 이도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잡혀간다니.'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야근을 하며 보고서를 정리하고, 상사에게 결재를 올릴 걱정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서진 사무실 한복판에 앉아, 자신의 신병이 확보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집혀버린 기분이었다. "저기... 그럼 회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이 상황에서도 회사 걱정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었다. "등록되면 건강 기록이 자동으로 마스킹돼요." "마스킹이요?" "회사 시스템에서 이도윤 씨의 건강 관련 데이터는 접근이 차단됩니다." 황가린이 짧게 설명했다. "대외적으로는 정상인으로 처리돼요." 이도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정상인으로 처리된다고?' 뭔가 이상하게 안도가 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정상인처럼 '처리'된다는 말은, 자신이 이미 정상인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손톱 끝에 아직 검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 파티션을 부술 때 튄 자신의 피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하세요." "제가 등록을 안 하면요?" 황가린의 눈이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권장하지 않아요." "만약이라고 했잖습니까." 이도윤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물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도망칠 생각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목소리였다. "미등록 뱀파이어는 위험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황가린이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혈액 섭취 욕구를 관리하지 못하면, 대량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요." 이도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혈액 섭취요...?" 목소리가 뒤집힐 듯 갈라졌다. "뱀파이어는 혈액을 섭취해야 활동 능력을 유지합니다." 황가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는 듯한 어조였다. "등록하시면 정식 혈액 공급 체계를 이용할 수 있어요." "등록을 안 하면요?"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무게가 상당했다. 이도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사무실을 부순 그 힘. 책상을 단번에 산산조각 낸 그 힘. 사람 몸이 낼 수 없는 힘이었다. 그 힘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같은 팀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같이 점심을 먹던 얼굴들. 야근을 함께하던 얼굴들.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도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손끝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이도윤이 낮게 대답했다. "등록하겠습니다." 황가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겁니까?" "네." 황가린이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며 말했다. 화면에는 낯선 코드와 좌표 같은 것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밤에만 접수가 가능해요. 이도윤 씨 같은 유형은 특히요." "...그건 왜죠?" 이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가린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짧게 대답했다. "낮에는 이도윤 씨가 이도윤 씨가 아니니까요." 그 말에 이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낮에는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니.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새벽 공기가 서서히 밀려들고 있었다. 어둠이 아직 짙었지만, 그 끝자락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황가린이 손목의 검은 팔찌를 눌렀다. 지지직- 허공에 희미한 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문양은 점점 또렷해지며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문 형태로 변해갔다. "따라오세요." 황가린이 그 문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도윤은 부서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책상, 서류, 모니터. 자신이 몇 달 동안 앉아 있던 자리였다. '이게 시작이구나.' 무거운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빛의 문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이도윤은 자신이 지나쳐온 모든 것들과 완전히 단절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문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공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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