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발소리는 가볍고 규칙적이었다.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짐승에 가까운, 그러나 훨씬 정제된 리듬이었다. 무너진 사당 문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은 새하얀 여우 아홉 마리쯤 되는 크기의 존재였다. 아니, 정확히는 여우 한 마리였는데 몸통에서 뻗어 나온 꼬리가 아홉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붉었고, 이마에는 옥으로 만든 것 같은 장식이 박혀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그 옥이 빛을 냈다. 마치 발걸음 수를 세고 있는 것처럼.
그 여우가 사람 말을 했다.
"오랜만이구나, 백룡."
노인이 그 말에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우보다 여우가 하는 말에 더 놀란 얼굴이었다. 여우가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몸을 그렇게 키우고 왔으니 마당이 남아나겠느냐. 앞다리 접어라."
나는 얼떨결에 앞다리를 접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보다, 그 명령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마치 평생 이 여우의 명령을 받아온 것처럼, 몸이 먼저 알아서 굽혔다. 여우는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코웃음을 쳤다.
"백룡의 그릇에 사람 하나가 들어앉았군. 재밌게 됐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룡이라니. 나는 강용준이었다. 물류회사 사원이었고, 오늘 오전까지는 두 다리로 걸었고, 지각계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던 인간이었다. 어제 저녁 회식에서 소주 세 병을 나눠 마셨고, 오늘 아침에는 알람을 세 번 껐다가 결국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인간의 하루였다. 그런데 눈앞의 신비한 존재는 나를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름은 강용준. 서울 변두리 물류회사 3년차 사원이었다.
지방대 물류학과를 나와 겨우 얻은 정규직이었다. 대단한 야망도 없었고, 승진에 목매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냥 매달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면 그걸로 만족하는, 그런 흔한 이십대 남자였다. 주말엔 게임을 하고 평일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바코드를 찍었다. 인생의 큰 사건이라고 해봐야 작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고양이를 데리고 나간 것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하필 새해 첫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힘에 휩싸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20미터짜리 용의 몸이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흔한 회사원의 하루가, 하필이면 용의 시작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여우의 이름은 설연이었다.
강원도 산중 이 폐사당, 백룡당에 좌정한 신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산신 대신 여우신을 모시는 특이한 사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재개발과 인구 감소를 겪으며 신도가 줄었고, 결국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폐가나 다름없는 곳으로 방치되었다. 한때는 정월이면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절을 올리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등산객이 길을 잘못 들어 잠깐 쉬어가는 헛간 취급을 받았다. 그런 곳에 20미터급 백룡이 뚝 떨어졌으니, 노인 입장에서는 심장이 멎을 뻔한 일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박도현. 이 사당의 당주였다.
오십대 후반, 조부 대부터 이어온 당주직을 물려받았지만 물려받은 건 사명감뿐이었다. 실질적인 후원도 신도도 다 끊긴 상태였다.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고, 매달 사당 유지비를 자기 돈으로 채워넣는 게 현실이었다. 젊었을 때는 이 일을 그만두고 도시로 나가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부의 유언과, 어릴 때부터 봐온 사당의 낡은 지붕이 그를 붙잡았다. 그런 그가 새해 첫날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용 한 마리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이, 이게 대체……."
박도현이 겨우 말을 이었다. 설연이 대신 대답했다.
"보다시피 사람이 용이 됐다. 흔한 일은 아니지."
"흔한 일이 아니라니요! 저건 재난입니다, 재난!"
"재난이든 축복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당주는 밥이나 좀 준비해라."
"저 크기에 밥을요?!"
"뭐든 상관없다. 산 하나쯤 먹여도 되고."
"산을요?!"
박도현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갔다. 설연은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홉 개의 꼬리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나는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게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구조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다.
둘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나는 몸을 조금씩 줄이려 애썼다. 마당을 완전히 부수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통제해야 했다. 몸을 줄인다는 게 무슨 감각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작아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니 비늘이 조금씩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산 아래쪽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 세 대였다.
인근 마을에서 새해맞이 산행을 하던 청년들인지, 사당 근처에서 굴러다니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몰려왔다. 맨 앞에서 달리던 놈은 헬멧도 안 쓰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 저거 뭐야! 용이잖아!"
옆에 있던 놈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외쳤다.
"야, 찍어! 찍어! 이거 조회수 미쳤다!"
세 번째 놈은 그냥 도망쳤다. 뒤도 안 보고 오토바이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세 번째 놈이 신고를 넣은 사람이었다.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몇몇은 사냥용 엽총까지 들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 용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SNS를 타고 퍼지자, 근처 도시에서 구경꾼과 유튜버들까지 차를 몰고 몰려들었다. 좁은 산길이 순식간에 정체되었다. 경적 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누군가의 드론 프로펠러 소리까지 뒤섞여 산 전체가 시장통처럼 변했다.
문제는 그 엽총이었다.
한 명이 흥분한 채 총구를 나에게 겨눴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박도현이 그 앞을 막아섰다.
"쏘지 마시오! 여긴 사당입니다!"
"저게 사람 잡아먹을 짐승인지 어떻게 압니까!"
"저건, 저건……."
박도현이 순간 말을 잃었다. 나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용입니다, 라고 해도 될지, 아니면 우리 신도입니다, 라고 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그 틈을 타 설연이 앞으로 나섰다. 아홉 갈래 꼬리가 부풀어 오르며 주변 공기가 서늘해졌다. 순식간에 산 전체에 안개가 깔렸다. 사람들의 발이 그대로 멈췄다.
"물러가라. 이곳은 오늘부로 다시 봉인된 성역이다."
설연의 목소리가 산 전체에 울렸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는데도 산 아래까지 또렷하게 퍼졌다. 그 위엄에 눌린 마을 사람들과 구경꾼들은 하나둘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총을 든 사내는 손에서 힘이 빠져 총을 놓칠 뻔했다. 몇몇은 넘어지면서도 카메라만은 꼭 붙잡고 도망쳤다. 유튜버 하나는 넘어진 채로도 라이브 방송을 끄지 않고 소리쳤다. "구독자님들, 저 지금 진짜 봤습니다, 이거 실화입니다!" 그 방송이 나중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결국 삼십 분 만에 산 아래는 텅 비었다.
남은 것은 나와 설연, 박도현뿐이었다.
"저 안개, 오래는 못 간다."
설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들 눈을 며칠은 속일 수 있어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 저 짐승 몸으로 여기 계속 있으면 다시 몰려올 거다."
박도현이 겨우 숨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당주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제가 관리하는 사당인데 왜 제 문제가 아닙니까!"
"소리 지르지 마라. 시끄럽다."
설연이 귀를 한쪽으로 접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이 인상 찌푸리는 것과 똑같아서, 나는 짐승의 몸으로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진지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김이 빠졌다.
설연의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백룡, 너는 원래 인간이었지. 그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라도 되는 대로 소리쳐보고 싶었지만, 목에서 나오는 건 낮은 울림뿐이었다. 사람이었을 때는 회의 시간에 말도 잘하던 나였는데, 지금은 고개만 끄덕이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설연이 짧게 웃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공짜는 아니지."
박도현이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설연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방법이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말을……"
"조건이 맞아야 하니까."
"조건이 뭡니까!"
"당주는 아직 몰라도 된다."
박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나는 이 노인이 이 여우를 얼마나 오랫동안 상대해왔는지 조금 짐작이 갔다. 아마 저런 표정을 짓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설연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이 사당과 백룡 사이에는 오래된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 지금 너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짐승의 몸으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하나 있었다. 이 여우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숨긴 것이 무엇인지, 나는 다음 순간 알게 될 예정이었다. 알았더라면, 차라리 산 아래로 도망친 그 세 번째 오토바이 청년처럼 뒤도 안 보고 이 산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