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강인데 무과금인 척할게요

3화

감정소 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나는 등 뒤에서 지훈이가 마이크에 대고 뭐라 더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 여러분! 오늘 방송 재밌으시죠? 강태현 씨가 좀 예민하신 분인가 봐요, 하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는데, 나는 그 웃음 아래 깔린 계산을 못 읽을 리가 없었다. 이런 놈들은 항상 그렇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그게 재밌는 그림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족속들. 크로니클 서버에서도 저런 새끼들 수백 마리는 봤다. 길드 뺏으려고 뒤통수 치는 놈, 아이템 사기 치려는 놈, 그리고 지금처럼 약자다 싶은 상대를 골라서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재롱을 강요하는 놈들. 그때 뒤쪽에서 우락부락한 체격의 남자 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체격은 좋았다. 팔뚝에 근육도 제법 붙어 있고, 걸음걸이도 무게가 실려 있는 걸 보면 헌터 등록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각성 판정은 받았을 몸이었다. 그런데 걸음이 너무 곧다. 균형이 예쁘게 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몸으로 부딪혀서 커진 놈들이라는 얘기다. "어, 손님. 대표님이 아직 얘기 안 끝났다는데요." 둘 중 키가 큰 쪽이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밀어냈는데, 나는 그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에도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저 손목의 각도와 발의 무게중심, 어깨 근육의 긴장도까지 전부 읽고 있었다. 왼발이 살짝 앞으로 나와 있다. 오른쪽 허리가 비어 있다. 저 자세로는 뭘 시도해도 절반은 성공 못 한다. "손 치우시죠." "뭐? 야, 이 새끼 봐라."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더 세게 밀었고, 그 순간 스튜디오 안쪽 카메라가 다시 이쪽을 향했다. 렌즈가 돌아가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저 카메라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이가 데스크에서 팔짱을 낀 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참, 사람 참 못 배웠네요. 여기 저희 매니저분들이 예의를 좀 알려드리려나 봅니다." 지훈이가 카메라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렸는데, 채팅창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패드립 뜬다' '드디어 사이다 온다' '저 새끼 표정 봐 ㅋㅋㅋ 쫄았네' '매니저 형들 좀 나서주세요' 댓글 하나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저 화면 뒤에 앉아 있는 인간들이 이걸 얼마나 즐기고 있을지 상상했다. 남의 인생이 뜯기는 걸 팝콘 씹으면서 보는 그 얼굴들이. 나는 그 순간까지도 참고 있었다. 진심으로 참으려고 했다. 동생들 병원비, 생활비, 이번 달 월세, 태민이 학원비까지 머릿속에서 계속 숫자로 굴러다녔고, 이런 데서 사고 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 숫자들 위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여기서 손 한 번 잘못 쓰면, 다음 달 통장에 찍힐 숫자가 아니라 협회 서류에 내 이름이 찍힌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는데, 그때 키 큰 남자가 내 봉투를 낚아채듯 손을 뻗었다. "그 마정석, 놓고 가시죠. 밀거래 신고할 수도 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 하나가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밀거래는 씨발 니들이 30만 원에 후려치려던 거잖아. 계산기 두드릴 줄도 모르는 새끼들이 감정가를 후려쳐놓고, 이제 와서 신고 운운하는 그 태도가 어이가 없어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이 상황이 너무 뻔뻔해서 웃긴 거다. "이거 왜 뺏으려고 하세요." "뺏는다뇨, 원래 저희 대표님이 관리하시는 물건인데." 남자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손이 봉투를 향해 뻗어오는 궤적이 이미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그 동작을 정확히 예측했고, 손목을 잡아 비틀며 반대편 팔로 남자의 팔꿈치를 짓눌렀다. "아악!" 남자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는데, 그 짧은 순간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손끝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그 손이 채 물건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 남자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뭐, 뭐야 이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는 여전히 이 상황을 그대로 방송하고 있었고, 지훈이는 데스크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서 방금까지의 여유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저 표정, 진짜 오랜만에 본다. 뭔가 자기 계산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인간의 표정. 나는 그 순간 딱 하나만 생각했다. 여기까지가 내 인내심의 한계다. 헌터 등록이 안 된 일반인이 어떤 이유로든 물리력을 행사하면, 그게 정당방위든 아니든 일단 협회 조사 대상이 된다. 특히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각성자 상대로 압도적인 물리력을 보이면, 그 즉시 '미등록 초각성체'로 분류되어 국가 감시 대상 명단에 올라간다. 감시 대상이 된다는 건 단순히 신고당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매달 정기 검진, 강제 등록 심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협회 산하 시설로의 격리 조치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참았던 거였다. 그런데 저 팔꿈치를 짓누르고 있는 손끝에서, 뭔가가 억눌러왔던 걸 뚫고 나오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가둔 문 안쪽에서 뭔가가 손잡이를 흔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낯선 감각이었다. 크로니클 서버에서, 여명 클랜을 이끌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남들보다 반응이 빠르고 판단이 정확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게임이니까 그런 게 가능했던 거라고, 현실은 다를 거라고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런데 게이트가 열리고, 이 세상에 마나라는 게 흐르기 시작한 뒤로, 나는 뭔가 다른 걸 느끼고 있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힘일까, 감각일까, 아니면 그냥 오래된 습관이 몸에 남아서 되살아나는 것뿐일까. 확실한 건, 이게 처음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예감이었다. "거기, 그만하시죠." 지훈이가 데스크를 짚고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는데, 목소리에서 아까의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조금 떨리는, 그러나 여전히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 남아 있었다. "안 그러면 저희도 정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어요." 정식으로 대응한다는 말이 참 우습다. 30만 원 부르던 놈들이 정식이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나. 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짧게 답했다. "대응하세요." 내가 그렇게 답하는 순간, 세 번째 남자가 스튜디오 뒤편에서 뛰쳐나왔는데, 그 손에 들린 건 그냥 몽둥이가 아니라 마나가 감긴 각성자용 진압봉이었다. 표면에 옅은 푸른빛이 일렁이는 걸 보면, 아마 협회 정식 유통 물건은 아닐 거다. 이런 방송국이 저런 걸 자체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기가 얼마나 지저분한 곳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후웅- 진압봉이 내 어깨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쳤다. 콰아아앙! 스튜디오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소리와 함께, 진압봉이 남자의 손에서 그대로 튕겨져 나가 벽에 박혔고, 남자는 충격으로 뒷걸음질치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벽에 박힌 진압봉이 파르르 떨리며 남은 마나를 흩뿌리는 게, 마치 방금 죽은 짐승의 마지막 경련처럼 보였다. 스튜디오 안은 완전히 정적에 빠졌다. 카메라만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채팅창은 아마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방금까지 '사이다 온다'며 신나 있던 댓글들이, 지금쯤이면 전부 물음표와 느낌표로 도배되어 있을 거다. '저거 진짜야?', '이거 방송 끊어야 하는 거 아니냐', '와 저 사람 뭐임' 같은 것들. 하-, 씨발. 나는 그 순간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이 정도 힘을 보였으면, 이건 그냥 조용히 덮을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각성자용 진압봉을 맨손으로 받아쳐서 튕겨낸 일반인. 이건 협회 입장에서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신상은 어딘가의 서버에 자동으로 올라가고 있을 거다. 지훈이가 데스크 뒤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구나. 그 잘난 웃음이랑 여유는 다 어디로 갔나. "강태현 씨." 지훈이가 그렇게 부르는 순간, 나는 마정석 봉투를 다시 주워 들며 낮게 대답했다. "매입 취소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대로 스튜디오 밖으로 걸어 나갔는데, 등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지훈이가 다급하게 뭔가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카메라 끄라는 소리와, 방금 그 장면 어떻게든 삭제하라는 소리가 섞여 있었을 텐데, 이미 실시간으로 나가버린 화면을 무슨 수로 지운다는 건지 모르겠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건물 앞에 협회 마크가 붙은 차량 두 대가 서 있었다. 너무 빨랐다. 이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건물 문을 나서기 전까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저 정도 규모의 협회 차량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도착한다는 건, 방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뭔가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아니면 저 봉투 속 마정석 자체가, 애초에 나를 이 자리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수도 있다. 차량 문이 스르륵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리며 나를 향해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는데, 그 무표정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강태현 씨 맞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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