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강인데 무과금인 척할게요

5화

일주일 뒤, 나는 강도현이라는 이름으로 헌터 자격시험 접수처 앞에 서 있었다. 서류에 적힌 나이는 그대로 열아홉이었지만, 이름 하나만 바뀐 게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접수처 직원이 신분증을 확인하며 "강도현 씨, 맞으시죠?"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이 한 발짝 늦게 나왔다. 강도현. 강도현. 몇 번을 되새겨도 그 이름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몸에 걸려 있었다. 접수처 앞 로비에는 나 같은 애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다들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애는 긴장한 얼굴로 계속 손을 비비고 있었고, 어떤 애는 이미 다 이긴 것처럼 여유롭게 껌을 씹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그냥 최대한 평범해 보이려고 애썼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게 이번 인생의 첫 번째 원칙이었다. 헌터 자격시험은 필기와 실기로 나뉜다. 필기는 몬스터 등급 체계, 던전 규정, 마나 운용 기초 이론을 다루고, 실기는 지정된 훈련형 게이트에서 감독관 배정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대응력을 평가한다. 필기 합격선은 60점, 실기는 감독관 재량 채점으로 최종 등급이 결정된다. 필기시험장에 앉아서 문제지를 펼치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다음 중 마나 코어의 색상별 등급 분류로 옳은 것은?" 마나 코어 색상? 그런 게 있었어? 나는 게임 시절 온갖 스킬 계수와 아이템 옵션은 다 외웠지만, 현실 세계 헌터 시스템 필기 이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지선다 보기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 읽을수록 더 헷갈렸다. 붉은색이 상급이라고 했나, 아니면 하급이었나. 아니 잠깐, 색깔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는 개념 자체가 나한테는 생소했다. 나는 이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게임에서는 몬스터 위에 등급이 알기 쉽게 떠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 협회에서 배포하는 헌터 매뉴얼 한 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두꺼운 책자를 받아 든 순간부터 침대 밑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다는 게 이제야 후회가 됐다. "몬스터 브레이크 현상 발생 시, 헌터가 취해야 할 1차 대응 절차를 서술하시오." 브레이크 현상이 뭐지. 나는 그 문제 앞에서 십 분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사각사각 답을 써 내려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리드미컬하고 자신 있게 들리던지, 나는 괜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애는 아마 학원이라도 다녔을 거고, 나는 게임 속에서 몬스터를 몇천 마리씩 썰어봤어도 이 시험지 앞에서는 그냥 백지 상태의 신입이었다. 결국 나는 대충 아는 대로 적었다. "몬스터가 갑자기 세지면 도망친다." 나름 성실하게 쓴 답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세지면 도망친다, 이보다 더 명확한 대응 절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중에 채점표를 받아보니 그 답에는 빨간 줄이 세 개나 그어져 있었다. 옆에 작은 글씨로 "1차 대응은 도주가 아니라 신고 및 안전지대 확보"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나는 그냥 헛웃음이 났다. 그럼 도망치면서 신고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필기 점수는 62점. 간신히 통과였다. 시험장을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 씨발, 이러다 진짜 필기에서 떨어지면 그것대로 웃긴 전설이 될 뻔했다. 실기시험 날, 나는 훈련형 게이트 앞에 다른 응시생 열두 명과 함께 서 있었는데, 다들 나이가 열여덟에서 스물 초반쯤으로 나랑 비슷비슷했다. 게이트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대기실까지 스며들어 있었고, 그 냄새 - 축축한 흙과 뭔가 미묘하게 비릿한 냄새 - 를 맡는 순간 나는 오랜만에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감각을 그리워했었나. 나도 잘 모르겠다. 감독관은 험상궂게 생긴 중년 남자였는데, 명찰에는 '실기감독관 최영도'라고 적혀 있었다. 팔뚝에 굵은 흉터가 있었고, 눈빛이 딱 몬스터 백 마리쯤 썰어본 사람 특유의 무심함을 담고 있었다. "오늘 배정된 몬스터는 E급 슬라임 계열입니다. 각자 순서대로 들어가서 삼 분 안에 처치하시면 됩니다." 최영도가 무미건조하게 설명하는데, 나는 그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응시생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 한 남학생이 검을 들고 들어가서 슬라임을 반으로 가르는 데 십 초도 안 걸렸는데, 그 동작이 딱딱하고 어색해서 나는 저게 정말 최선인가 싶었다. 자세도 불안정했고, 검을 휘두르는 궤적도 낭비가 심했다. 저런 식으로 계속 싸우면 나중에 상급 몬스터 만났을 때 팔부터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 뭐 굳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또 다른 여학생은 마법으로 슬라임을 얼려버렸는데, 마나 소모가 너무 커서 감독관이 감점 표시를 했다. 그 애는 손끝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슬라임 하나 잡는 데 저렇게 진을 빼다니, 나는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구나 싶어서 괜히 숙연해졌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무기 대신 그냥 맨손으로 게이트 안에 들어갔다. "무기 안 챙기셨어요?" 최영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는데,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없어도 될 것 같아서요." 최영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 이런 근본 없는 응시생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되게 조심스럽게 다짐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딱 통과할 만큼만. 그냥 살짝 밀어서 넘어뜨리기만 해도 처치 판정 나오겠지. 삼 분 안에 여유롭게, 아주 평범하게. 게이트 안에 들어서니, 슬라임 한 마리가 흐물흐물한 몸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 움직임을 보는 순간 이게 정말 삼 분이나 걸릴 상대인가 싶었다. 반투명한 몸뚱이 안으로 핵이 희미하게 보였고, 움직임은 느려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게임 시절 튜토리얼 몬스터보다도 약해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나는 지난 며칠간 계속 스스로한테 다짐했었다. 최하급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딱 통과할 만큼만. 그런데 몸이라는 게, 오랫동안 눌러둔 감각이라는 게, 머리로 생각하는 대로 딱딱 움직여주지가 않았다. 슬라임이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내 몸은 이미 최적의 거리와 타점을 계산하고 있었고, 근육은 머리보다 먼저 반응할 준비를 마쳐버렸다.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재채기처럼, 조절이 안 됐다. 슬라임이 몸을 부풀리며 나를 향해 튀어오르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몸통을 그대로 짓눌렀다. 퍼억- 슬라임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짜부라져 바닥에 퍼졌는데, 그 소리가 게이트 밖까지 울려 나갔다. 삼 초. 삼 분이 아니라, 삼 초였다. 게이트 안에 남은 건 바닥에 넓게 퍼진 젤리 같은 흔적뿐이었고, 나는 그걸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아, 망했다. 이건 그냥 통과가 아니라 확실하게 눈에 박혀버린 그림이었다. 게이트 밖에서 지켜보던 최영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고, 나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아, 좆됐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기, 응시생." 최영도가 태블릿을 확인하며 걸어오는데, 그 뒤로 다른 응시생들도 웅성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검으로 십 초씩 걸려 슬라임을 잡았던 남학생도, 마나를 그렇게 쏟아부었던 여학생도 다들 나를 보고 있었다. 얼음 마법을 쓴 여학생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아직도 얼굴에 파란 기가 남아 있었다. "방금 그거, 마나 반응이 측정 한계치를 넘어서 기록이 안 됐는데요." "...네?" "측정기 오류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요." 최영도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거는 사이,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응시생들 틈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른,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였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몇 년 전 게임 채팅창에 마지막으로 남겼던 대화창이 눈앞에 겹쳐 떠올랐다. 그때 그 애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뭐였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났지만, 뭔가 서늘한 뉘앙스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서윤아였다. 그 애도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표정이 딱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눈빛 안에 담긴 감정이 반가움인지, 의심인지, 아니면 순전한 경악인지 구분이 안 갔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애가 나를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하-, 씨발. 이 좁은 세상에서, 굳이 여기서, 이 타이밍에. 나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최영도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리며 시선을 슬쩍 다른 데로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는데, 슬라임 하나 짓눌러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최영도가 다시 다가오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게이트 안쪽 측정 패널이 붉게 점멸하며 요란한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잉- "측정 초과 경고. 즉시 상급 감독관 호출." 기계음이 그렇게 반복해서 울리는 가운데, 대기 중이던 응시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고, 몇몇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게이트 쪽을 향해 목을 빼고 있었다. 최영도의 손에 든 태블릿 화면이 붉게 번쩍이는 걸 나도 곁눈질로 확인했는데, 저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몰라도 좋은 신호는 절대 아니었다. 나는 이 조용하고 눈에 안 띄는 시작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며 얼굴이 서서히 굳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윤아의 시선이 여전히 나를 향해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다는 걸, 나는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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