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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본좌, 이도현이라 하는 이 몸이 서울 하늘 아래 최상위 배치조에서 검성지위(劍聖之位)*를 노리던 것도 어느덧 지난 일이 되었으니··· *검성지위: 검의 성인이라 불릴 만한 지위 그날의 굴욕을 어찌 잊으리오. 본좌, 이 굴욕을 낱낱이 적어 후일 사서(史書)에 남기고자 하노라. 던전이라는 이름의 이 신묘한 공간은, 본좌가 회귀 이전 무림에서 겪었던 그 어떤 사지(死地)보다도 좁고 답답한 곳이었다. 돌벽은 매끈했고, 몬스터라 불리는 요물들은 칼로 베면 빛으로 흩어졌으며,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참으로 청결한 강호로다. 삑- 삑- 삐빅- [던전 클리어. 파티원 전체 경험치 지급.] [힐러 이도현 : 초당 30HP 회복. 누적 회복량 12,400.] [신규 힐러 서하늘 : 1회 200HP 회복. 이펙트 점수 +900.] 요망한 손바닥만 한 기계, 세상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라 부르는 그 물건이 던전 클리어 결과창을 띄웠을 때, 본좌는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었다. 등골을 스치는 냉기, 이는 필시 흉조(凶兆)*의 전조였다. *흉조: 불길한 조짐 파티장 강태림이라는 자가 검을 어깨에 걸치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검사 직업을 가진 자였으나, 그 눈빛은 검보다 계산기에 더 익숙해 보였다. 그의 뒤로는 반짝이는 조명 기구 몇 개가 삼각대 위에 서 있었으니, 이 또한 낯설고 의심스러운 요물이 아닐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방송 장비'라 부르는 물건이라 했다. "도현 씨." 본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이번 방송 조회수 봤어요? 하늘 씨 힐 이펙트 나올 때마다 채팅창 폭발이던데." "그것이 무슨 상관이더냐." 강태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 씨 힐은... 화면에 안 뜨잖아요. 30씩 계속 채우는 거, 시청자들이 지루하다고 그래요." 본좌의 회복술은 초당 삼십의 생명력을 채우는 지속형 술법이었다. 화려한 빛도 없고, 폭발하는 소리도 없다. 그저 상처가 조용히 아무는 것뿐. 마치 산속 옹달샘이 마르지 않고 졸졸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나 그 조용함이 죄가 될 줄이야, 뉘 알았으리오. 파티원 중 하나였던 도적 계열의 사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래도 도현 형 힐 없었으면 우리 진작 죽었을걸. 그거 왜 몰라주냐." "조용히 해." 강태림이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 하늘 씨 계약 얘기하는 거잖아." '하늘 씨 계약이라니.' 본좌는 그제야 이 자리의 본질을 깨달았다. 이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처형장(處刑場)*의 예비 절차였던 것이다. *처형장: 죄인을 죽이는 장소, 여기서는 반어적으로 씀 서하늘이라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신규 힐러였고, 한 번에 이백의 생명력을 쏟아붓는 폭발형 술법을 부렸다. 화려한 빛무리가 사방을 채웠고, 그 빛에 사로잡힌 관객들의 환호성이 방송 화면 너머로도 들려오는 듯했다. 손톱은 붉게 칠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인위적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로 장식되어 있었으니, 이 역시 강호의 예법과는 거리가 먼 치장이었다. "오빠, 미안한데." 서하늘의 목소리엔 미안함이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저 들어오면 오빠 자리 없는 거 알죠?" "자리라 함은···" 본좌가 되물었다. "파티 자리요. 힐러 두 명 필요 없잖아요. 저 이번에 팀 계약금도 크게 받았거든요. 오빠가 나가주셔야 될 것 같은데." '요망한 계집이로다.' 본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힘이 곧 진리인 이 강호에서, 화려함이 곧 무게가 되는 것을 어찌 탓하리오.' 강태림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가 아니라 전서구, 아니 스마트폰 화면 위에 뜬 계약 해지 문서였다. 화면 속 글씨는 작고 빽빽했으며, 본좌의 눈에는 마치 부적처럼 보였다. 다만 이 부적은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내치는 부적이었다.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파티 탈퇴 확정.] [소속 해제. 배치 순위 초기화.] [※ 배치 순위 초기화 시 재배치까지 평균 대기기간 6개월.] 본좌는 그 문구를 세 번 읊어보았다. 여섯 달이라. 반년이라는 세월을, 이 몸은 강호의 낭인이 되어 떠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뒤통수가 서서히 뜨거워짐을 느꼈으니, 이는 화(火)의 기운이 역류하는 조짐이었다. "참으로 각골난망(刻骨難忘)*하도다." 본좌가 중얼거렸다. *각골난망: 뼈에 새길 만큼 잊기 어려운 은혜, 여기서는 반어적으로 씀 "네?" 강태림이 눈을 찌푸렸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말라." "도현 씨, 괜히 그런 옛말 쓰지 말고 그냥 서명하시면 돼요. 어렵게 안 갈게요." 본좌는 서명을 마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것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저···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이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을 뿐. 눈가가 잠시 촉촉해졌으나 이내 급히 말랐으니, 이는 필시 던전의 건조한 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좌는 그리 믿기로 하였다. 서하늘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역시 태림 오빠 결단력 최고!" 강태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 씨도 이해하실 거예요. 요즘 시청자들은 눈으로 보는 힐을 원하거든요. 지속형은... 좀, 뭐랄까." "지루하지." 서하늘이 대신 말을 맺었다. 지루하다니. 본좌의 회복술은 지치지 않고, 마르지 않으며, 하루 종일 술법을 펼쳐도 정신력이라는 것이 단 한 톨도 소모되지 않는 신묘한 기예였다. 반나절을 쉬지 않고 힐을 넣어도 본좌의 내공은 마르지 않으니, 이는 강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절학(絕學)*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 꾸준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절학: 뛰어나고 독보적인 무예 화려한 것만이 살아남는 강호. 본좌는 그 이치를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파티원들은 이미 짐을 챙기며 다음 던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본좌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대화 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도적 계열의 사내만이 미안한 눈빛으로 잠시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마저도 곧 시선을 돌렸다. 무림맹, 아니 헌터 협회 로비를 나서며 본좌는 통행패, 아니 헌터 라이선스를 꺼내 보았다. 카드 위의 숫자가 초라하게 깜빡였다. [배치 순위: 미확정.] 로비의 대형 화면에는 서하늘의 힐 이펙트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붉고 푸른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 아래 자막에는 '역대급 신인 힐러 등장'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으니, 본좌는 그 문구를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본좌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다. '좋다. 이 강호가 본좌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본좌는 다른 강호로 가리라.' 고향, 그 산골 마을로. 버스라 부르는 철마(鐵馬)*를 타고 가야 할 것이었다. 표를 사기 위해 곳간, 아니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을 때, 본좌는 문득 그 안에 남은 공납의 액수가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었다. *철마: 철로 만든 말, 여기서는 자동차·버스를 이름 하나 그곳에서 본좌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이때의 본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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