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현은 몸이 어디에도 닿아 있지 않은 채 무한히 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기도, 혹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 던져진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부유감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소리를 내려 해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고, 손을 뻗어보려 해도 팔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며, 오직 의식만이 홀로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다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이상한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따라와야 할 것 같은 순간에도 도현의 내면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는 사실이었는데, 마치 이 부유감 자체가 이미 몇 번이고 겪어본 익숙한 절차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꿈인가. 아니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 진동하는 감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낮은 진동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어둠의 결을 흔들었고, 그 소리가 점점 커질 때마다 도현의 시야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의 실선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다.
실선들은 이내 서로 엮이며 형체를 갖추었고, 마치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 보는 듯한 화면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낯선 도시의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가르는 균열이었다.
하늘 한복판에 새겨진 새하얀 균열은 마치 유리에 생긴 실금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검푸른 빛이 새어 나오며 도시 전체를 기괴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균열의 가장자리에서는 이따금씩 미세한 불꽃 같은 것이 튀어 오르며 사라졌는데,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숨결처럼 규칙적으로 맥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현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건, 게이트?'
뉴스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단어가 도현의 머릿속에 스쳤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압도적인 규모로 그것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면 속 도시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현실의 어느 도시와 겹쳐 보였는데, 무너진 간판과 부서진 차량들이 거리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저 균열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라는 사실을 무언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화면이 다시 흔들리며 시점이 급격히 가까워졌고, 도현은 자신이 어느새 그 도시의 한 거리 위에, 낯선 몸을 빌려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밑의 감각이 뒤늦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딱딱한 아스팔트의 진동과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촉감까지 생생하게 전해져 왔고, 그 순간 도현은 이것이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고 있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손을 들어보려던 그는 오른쪽 어깨 아래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는데, 팔뚝의 절반부터 완전히 사라진 채 낡은 붕대만 감겨 있는 그 팔이,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자신의 몸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 팔은.'
붕대 사이로 드러난 절단면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아물어 있었고, 그 위로 겹겹이 감긴 천은 수없이 갈아 감았던 손길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최근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 이미 이 몸의 주인이 오랜 시간 안고 살아온 결핍이라는 뜻이었다.
낯선 감각에 당황할 틈도 없이, 도현의 시야는 거울처럼 반사된 유리창을 스치듯 지나갔고, 그 안에 비친 얼굴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초췌한 남자의 얼굴이었으며,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입가에는 오래도록 웃음기를 잃은 사람만이 가질 법한 무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내 얼굴이라고?'
거울 속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도현은 이 남자가 살아온 세월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는데, 광대뼈 아래로 파인 그늘과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가, 수없이 반복된 절망의 흔적을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방어구를 걸친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대기실 같은 공간이었고, 벽면에는 커다란 전자 게시판이 붙어 있어 무언가 숫자와 등급을 표시하고 있었다.
대기실 안은 서늘한 금속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곳곳에 놓인 낡은 의자와 벤치 위로 사람들이 무기를 손질하거나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누구의 얼굴에서도 여유나 기대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포터 등급 : E]
낮은 등급 옆에 적힌 이름 하나가 도현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편팔]
'편팔? 이게, 내 이름이야?'
그 순간 그는 옆에 놓인 낡은 명패를 발견했고, 명패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설명이 그 이름의 유래를 짐작하게 해 주었는데, 몬스터에게 팔 한쪽을 잃고도 서포터로 겨우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두고 동료들이 붙여준,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별칭이었다.
'와, 이름 한번 지독하게 지었네. 이게 무슨 인생이냐.'
명패를 다시 들여다보는 도현의 시선이 씁쓸하게 흔들렸는데, 등급 옆에 자그마하게 새겨진 누적 던전 클리어 횟수와 그 옆의 사망 위기 기록들이, 이 몸의 주인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순간을 벼랑 끝에서 버텨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E등급이라니. 이 세계에서는 최하위란 소리인가.'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른 명패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위에는 B, A, 심지어 S등급까지 적힌 이름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그 격차가 얼마나 잔인하게 벌어져 있는지가 한눈에 드러났다.
'이 몸, 어지간히 고생을 했나 보네.'
왜애애앵! 왜애애앵! 왜애애앵···
귀청을 찢을 듯한 사이렌이 대기실 전체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고,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챙기며 출입구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경보다.'
낯선 몸의 감각이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도현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그들 사이에 섞여 들었고, 붕대 감긴 팔의 통증이 뒤늦게 온몸으로 번지며 그를 현실 같은 착각 속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야. 이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어.'
머리로는 낯설고 두려운 상황임에도, 몸은 이미 수백 번은 겪어본 절차를 밟는 사람처럼 침착하게 방어구를 챙기고 대열의 흐름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이질감이 도현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게시판 위 전광판에는 붉은 글씨로 커다란 문구가 점멸하고 있었다.
[던전 게이트 출현 — 즉시 파티 편성 요망]
전광판 아래쪽으로는 이번에 출현한 게이트의 좌표와 예상 등급이 함께 표시되어 있었고, 그 숫자를 확인한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하나둘 새어 나오는 것을, 도현은 편팔의 귀를 빌려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이번 건 등급이 높잖아. 또 서포터가 몇이나 죽어 나가겠어."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스치듯 지나갔고,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묵묵히 무기를 챙기는 모습이, 이곳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이미 무뎌질 만큼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주변 동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짙은 긴장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고, 그 표정들 속에서 도현은, 아니 편팔이라 불리는 이 몸의 주인은, 이런 상황이 결코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듯 보였다.
'설마, 이게 내 미래인가.'
도현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물음표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어째서 자신이 이 낯선 몸에 들어와 있는지, 이곳이 정말 현실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짜인 환상인지, 그리고 이 편팔이라는 남자의 삶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 그 무엇도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낯선 세계, 낯선 몸, 그리고 낯선 이름 속에서 도현의 의식만이 홀로 또렷하게 깨어 있었고, 그 자각과 동시에 저 멀리서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오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편팔! 뭐 하고 있어, 빨리 안 오고!"
목소리의 주인은 낡은 창을 어깨에 걸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그 얼굴에는 익숙한 짜증과 함께 옅은 걱정 같은 것이 동시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편팔과 이 사내 사이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도현의 심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짓눌리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거, 지금 저 사람 따라가야 하는 건가.'
몸은 이미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고, 도현의 의식은 그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며, 자신이 이 몸의 주인인 편팔로서 대체 무슨 말을 하게 될지조차 예측할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잠깐, 잠깐만. 나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러나 편팔의 다리는 이미 사내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낯선 목소리로 낯선 말이 튀어나오려는 그 순간, 도현의 시야 저편에서 검푸른 균열의 빛이 대기실 창문을 통해 스며들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