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마당에 나섰다.
문턱을 넘는 순간,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전생에서는 이런 아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전장이었고, 공기는 피 냄새와 화약 냄새로 무거웠다.
이번에는 흙냄새였다. 마른 풀냄새였다.
낯설었다.
진가의 저택은 크지 않았다. 세 대가문 중 하나라 하지만, 다른 두 가문에 비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소년의 기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담장은 낡았고, 기와 몇 장은 이가 빠져 있었다. 마당의 흙은 오래 손보지 않은 듬이었다. 마당 가장자리에 세워진 낡은 창틀 하나가 바람에 삐걱거렸다.
그럼에도 공기에는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낡은 담장과, 손보지 않은 흙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는 그 기운의 근원을 곧 알아차렸다.
마당 한편, 아버지 진무애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든 채,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지된 자세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느꼈다.
압(壓).
전생에서 수도 없이 겪었던 감각이었다. 강자가 뿜어내는, 소리 없는 기세.
발끝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냉기 같은 것.
나는 걸음을 멈췄다.
다리가 저절로 굳었다.
*전생에서는 이 정도 기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이 몸은 열 살이었다. 힘도, 내공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압도당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5성 대검사(五星大劒士).
소년의 기억이 그 말을 알려주었다. 흑철성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의 강자였다. 전생에서 만났던 수많은 강자들 사이에 놓아도, 결코 낮지 않은 경지였다.
세 대가문 중 형편이 가장 어렵다는 진가에, 이런 인물이 가주로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진무애가 천천히 검을 검집에 넣었다.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일어났구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예."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의 눈이 나를 다시 훑었다. 어제와 같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다음 다시, 눈으로.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이런 시선을 받으면 상대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먼저였다. 적인지, 아군인지, 혹은 그저 호기심인지.
이번에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 사람의 눈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보아라."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무것이든. 걷거나, 뛰거나, 팔을 뻗거나."
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거절할 자격도 없었다.
나는 몇 걸음을 걸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열 살짜리 몸은 여전히 낯설었다. 무게 중심을 잡는 법조차 다시 익혀야 했다.
발을 내딜 때마다 무릎이 흔들렸다.
전생이었다면, 이 몸으로도 백 걸음쯍은 흐트러짐 없이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검을 쥐지 않고도, 숨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금은 열 걸음도 채 못 가 숨이 가빠졌다.
나는 팔을 들어보았다. 어깨가 뻐근했다. 팔을 뻗는 각도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낯섦이었다.
이 몸은,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진무애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말없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불편했다.
전생에서는 누구도 나를 이렇게 오래 관찰한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시선을 오래 두는 자는 대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지금, 관찰당하는 쪽이었다.
관찰당하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일이었나.
나는 새삼 그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숫자를 세는 것으로 그 불편함을 견뎠다.
"됐다."
진무애가 말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숨을 골랐다.
"들어가서 쉬어라. 보름 후에 선택 의식이 있다."
"선택 의식이라니요."
내가 물었다.
"가문의 아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자리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명령도, 걱정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어조였다.
"재능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검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그가 다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조금 전과 같은 자세였다. 조금 전과 같은 정적이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등이었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대답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걸음이 아직 어색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나았다.
---
방으로 돌아가는 길, 마당 구석에서 한 아이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형!"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눈빛에는 아직 세상의 무게가 얹히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걸 보니, 꽤 먼 곳에서부터 뛰어온 모양이었다.
"진우."
소년의 기억이 그 이름을 알려주었다. 삼촌의 아들, 사촌동생 진우였다.
기억 속의 진우는 늘 밝았다. 걱정이 없는 아이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형, 몸은 괜찮아요? 이틀 동안 아무도 형 방에 못 들어가게 해서 걱정했어요."
진우가 내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온기가 있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었다. 검을 오래 쥔 손이 아니었다. 아직은.
"괜찮다."
"다행이다. 형이 아프면 나 심심해요."
진우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이런 온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검이거나, 적의였다. 손을 내미는 자가 있다면, 그 손에는 대개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작은 손 하나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무 계산 없이.
"형, 어디 갔다 왔어요? 밖에 나가 있는 거 처음 봐요."
"아버님을 뵈었다."
진우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스쳤다.
"아, 아버님 아침 수련 시간이었구나. 형, 무섭지 않았어요?"
"...무서웠느냐, 너는."
"저요? 저는 아버님 근처에도 안 가요. 그 앞에 서면 다리가 막 떨려요."
진우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솔직한 반응이었다.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이 아이도, 그 압을 느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저택의 아이들 대부분이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나만이 유일하게 그것을 견뎌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덜 흔들렸을 뿐이다.
"형, 오늘 바람 좀 보러 갈래요? 제가 요즘 바람 속성 수련하는데, 진짜 재밌어요."
"바람 속성이라."
"네! 스승님이 저더러 재능 있다고 했어요."
진우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 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 근심 없는 아이의 눈이었다.
전생에서 내가 마주했던 아이들의 눈은 이렇지 않았다. 전장에서 자란 아이들의 눈에는 늘 그늘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계산이 있었다.
이 아이의 눈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아직은.
보름 후, 선택 의식이 있다고 했다.
그 의식이 이 아이의 눈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가자."
짧게 답했다.
진우가 앞장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걸음이 느렸다. 몸이 아직 마음을 따라오지 못했다.
"형, 왜 이렇게 천천히 걸어요? 어디 아파요?"
"아니다. 그냥... 걸음이 낯설다."
"낯설다니요? 형은 원래부터 걸을 줄 알았잖아요."
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몸이 낯선 것은, 이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진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음을 늦춰주었다.
그 배려가, 낯설면서도 나쓸리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지르며, 진우는 계속 말을 걸었다.
"형, 바람 속성은요, 처음엔 그냥 바람이 부는 것 같은데 나중엔 진짜 칼날처럼 변해요. 스승님이 그러셨는데, 저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
"형은 무슨 속성일 것 같아요? 나는 형이 불 속성일 것 같아요. 왜냐면 형 눈이 좀 뜨거워 보여서요."
뜨겁다는 말에,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내 눈이 뜨거워 보인다고.
전생에서는 누구도 내 눈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 차갑다, 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그럴 리 없다."
"에이, 두고 봐요. 선택 의식 때 알게 될 거예요."
진우가 다시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따라 걷다가, 문득 등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그 시선이, 단순한 관심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선의 무게가, 등을 누르는 것 같았다.
담장 너머로, 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진우의 옷자락이 흔들렸다.
바람은 차가웠다. 계절에 맞지 않는 냉기였다.
나는 그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마당 한편, 진무애가 서 있던 자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선택 의식.
보름 후.
나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 새겼다.
이 몸으로, 이 낯선 다리로, 보름 후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 시선의 주인은, 이미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