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입 탐사자가 최강이라니

3화

쿠웅! 다시 한번 땅이 흔들렸다. 먼지구름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2미터는 훌쩍 넘는 몸집, 회색 가죽, 붉은 눈. 오크였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만화나 게임 화면 속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 두꺼운 팔뚝, 저 눈빛. 마치 굶주린 맹수가 톰슨가젤 떼를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톰슨가젤이 바로 나였다. 비명이 사방에서 터졌다. 명품 전투복을 자랑하던 무리도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으아아아!" 스킬을 쓰겠다며 폼을 잡던 남자가 정작 아무것도 못 하고 뒷걸음질 치는 게 보였다. 장비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 브랜드 로고 박힌 갑옷을 자랑하며 나 같은 무등급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도끼 한 번 못 휘두르고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세상 참, 장비빵이라는 게 이럴 때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싶었다. 나는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무기도, 스킬도, 아이템도 없는 내가 오크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도망뿐이었다. 자존심 상할 것도 없었다. 살아야 했으니까. 솔직히 자존심 상할 자존심조차 없었다. B급 인생, 아니 이번엔 등급조차 없는 인생 아닌가. 도망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폐 속이 타는 것 같았다. 다리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숲 사이로 나뭇가지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프다는 감각조차 뒤늦게 따라왔다. 갑자기 발밑에서 뭔가 걸렸다. "어어—!"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붙잡았다. 발밑을 보니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스무 살쯤일까.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걸 보니 접질린 모양이었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와주면 나도 위험해진다. 도망치면 나 하나는 살 수 있다. 합리적인 선택은 명확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까? 그래도 될까? 어느 쪽이든?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생존 확률, 위험도, 손익. 그런데 정작 몸은 계산기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 이름은 한소연이에요... 제발 저 좀..." 한소연. 그 이름이 왜 그렇게 오래 남을 것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일어날 수 있어요?" "발목이... 삐끗한 것 같아요." 오크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쿵. 땅이 울리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심장이 그 진동에 맞춰 벌렁거렸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의 팔을 내 어깨에 걸치고 함께 뛰기 시작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온몸으로 매달리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쪽 다리로 균형을 잡으려는 그녀 때문에 나까지 자꾸 휘청거렸다. "조금만 참아요." "미, 미안해요... 저 때문에..." "말할 힘 있으면 뛸 힘도 있어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정작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놓고 도망칠까? 아니, 이미 늦었다. 그럼 어떻게든 버텨야 하나? 대답 없는 질문들이 발걸음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그때,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박기준이었다. 경비원 복장 대신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뭐 해, 빨리 안 비켜?" 그가 우리를 지나쳐 오크 앞으로 걸어갔다. 경비원 아저씨라던 사람이 이렇게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아니 이건 좀 과장이 심한가. 그래도 그 순간엔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경비원 아저씨가...?" 한소연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경비원이자 감독관이야. 판정 도중 목숨이 위태로운 참가자는 구조할 의무가 있어." 박기준이 오크를 향해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쿠아아앙! 둔탁한 충격음이 사방을 울렸다. 오크가 뒤로 밀려나며 신음을 흘렸다. 거대한 몸집이 저렇게 쉽게 밀려나는 걸 보니, 저 사람은 확실히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등급도 없는 나와는 근본부터 다른 존재. "너희들은 빨리 안전지역으로 이동해. 여기 오래 있지 말고." 박기준이 소리쳤다. 그의 시선이 잠깐 나를 향했다. "잘했다. 도망 안 치고." 짧은 한마디였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뭉근해졌다. 나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다시 한소연을 부축해 뛰었다. 등 뒤에서 도끼와 오크가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안전지역이라는 곳은 구역 중앙에 마련된 결계 구조물이었다. 투명한 막이 둘러쳐진 공간 안에는 이미 몇몇 참가자들이 모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결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한소연을 벤치에 앉히고 발목을 살펴봤다. 부어 있었지만 심하게 다친 건 아닌 듯했다. "고마워요. 진짜로." 한소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그냥 뛰다 걸린 거예요." "거짓말. 도와주려고 온 거잖아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사실 나조차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침묵이 잠깐 흘렀다. 결계 밖에서는 여전히 비명과 굉음이 간간이 들려왔지만, 이 안은 이상하게도 딴 세상 같았다. "저는 3구역 판정 두 번째예요. 첫 번째 때는 아무것도 못 하고 실패했어요." 한소연이 말을 이었다. "재판정 대상이라 여기 또 온 거고요. 도현 씨는요?" "첫 판정이에요." "헌터 등급 없으신 거예요?" "네. 스킬도, 아이템도, 아무것도 없어요." 한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저를 왜..." 대답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냥, 발이 먼저 움직였다고 해야 할까. 이유를 설명하자면 백 가지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 시야 한쪽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특별 조건 충족: 위험 상황에서 타인 구조] [숨겨진 자격이 개방됩니다] [※상세 내용은 다음 조건 충족 시 갱신됩니다] 또 저 문구다. 조건, 조건, 조건.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이 시스템이라는 놈은 항상 이런 식이다. 뭔가 던져주고는 정작 알맹이는 감춘다. 마치 애 앞에 사탕만 흔들어 보이고 정작 봉지는 안 뜯어주는 것처럼. 텍스트가 사라지자마자, 결계 막 너머에서 새로운 소란이 일었다. "저기 봐, 뭔가 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계 안 사람들이 일제히 밖을 바라봤다. 안전지역 밖, 먼지 구름 사이로 뭔가 거대한 실루엣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크보다 훨씬 큰 몸집이었다. 옆에 있던 한소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나 역시 숨을 죽인 채 그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