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후 11시 47분.
한강대교 위는 비어 있었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다리 난간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다리 아래는 검은 강이었다.
나는 그날도 야근을 하고 걸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게 지름길이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실루엣이 이상했다.
사람이 서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나는 멀리서 그 여자를 봤다.
난간을 넘어가려는 자세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을 삼켰다.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그다음 발이 뛰었다.
달렸다.
거리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50미터.
30미터.
그 짧은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거기!"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 발이 이미 난간 밖으로 넘어가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것뿐이었다.
표정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도를 올렸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땅을 박차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
두 번째 발이 넘어가는 순간, 나는 몸을 던졌다.
손끝이 여자의 옷깃을 잡았다.
천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려는 감각이 났다.
나는 손을 더 깊이 말아 쥐었다.
그대로 함께 떨어졌다.
허공에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가로등 불빛이 위로 멀어졌다.
그리고 강이 왔다.
강물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냉기였다.
숨이 막혔다.
갈비뼈 어딘가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폐 속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물속에서 여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발버둥이 느껴졌다.
살고 싶다는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냥 반사였다.
몸이 알아서 물을 밀어내려는 움직임.
그게 슬프게 느껴졌다.
왜 슬픈지는 몰랐다.
나는 다리를 저었다.
물살이 온몸을 잡아끌었다.
팔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힘없는 팔로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공기가 폐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감각이 아프면서도 반가웠다.
"숨 쉬어요."
여자는 기침을 했다.
토하듯 물을 뱉어냈다.
검은 강물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고 싶다는 의지도, 죽고 싶다는 절박함도.
그저 텅 빈 두 개의 구멍 같았다.
"왜 구해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물에 젖은 목소리라기보다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목소리 같았다.
"살아야 하니까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가 없다는 그 말에 무슨 말을 얹어야 할지 몰랐다.
대신 그녀를 강가로 끌고 갔다.
팔 한쪽으로 그녀의 몸을 감고, 다른 팔로 물을 밀었다.
갈비뼈가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번개처럼 쳤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오후 11시 58분.
둔치에 올라왔다.
젖은 흙 위에 여자를 눕혔다.
숨은 쉬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갈비뼈가 부러진 게 확실했다.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왔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 옆구리를 관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숨을 열 번쯤 몰아쉬자 통증이 옅어졌다.
스무 번쯤 지나자 아예 사라졌다.
손으로 옆구리를 눌러봤다.
부러졌던 자리가 멀쩡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늘 그랬다.
다치면 낫는다.
칼에 베여도, 뼈가 부러져도, 심지어 죽어도 다시 눈을 뜬다.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안다.
---
1만 년.
숫자로 말하면 그게 다였다.
나는 그 시간을 산속에서 홀로 수련했다.
검을 휘두르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검을 휘둘렀다.
그 세계의 시간은 이 세계와 다르게 흘렀다.
한 번 죽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강해졌다.
처음 백 년은 그저 살기 위해 검을 잡았다.
다음 천 년은 익숙해졌다.
그다음부터는 셈을 그만두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지, 해가 몇 번 떴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하나였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다음 순간에도 살아남는 것.
산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 소리와 검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뿐이었다.
가끔은 그 침묵이 사람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견뎌냈다.
견디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형체가 없었다.
목소리만 있었다.
하늘 전체가 그 목소리로 가득 찼다.
바람도, 나뭇잎도, 흙조차도 그 목소리에 눌려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1만 년을 버텼구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신이라 해도 좋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1만 년 동안 아무에게도 무릎 꿇은 적 없던 내가, 그 순간엔 저항할 수 없었다.
"네게 축복을 내리겠다."
"축복이라니요."
"현대 한국이라는 세계로 너를 보내주겠다. 그곳에서 너는 사람을 구하며 살 것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네 심장이 원하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1만 년 동안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산속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구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가끔은 검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늘 누군가를 구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
"대가는 무엇입니까."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
그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대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대답입니까."
"지금 알면 넌 계약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때 웃었다.
1만 년을 버틴 놈이 지금 와서 겁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가든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신감이 얼마나 값싼 것이었는지.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다음 순간 나는 한국의 어느 병원 침대 위에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낯설게 밝았다.
그 순간부터 내 시간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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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치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다급한 발소리였다.
운동화가 젖은 흙을 밟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도현!"
백설아였다.
백발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지나갈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번쩍였다.
달려오는 걸음이 다급했다.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멈춰 섰다.
"괜찮아?"
"괜찮아요."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그다음 가슴을, 그다음 손끝을 훑어봤다.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들이 있었다.
손끝, 손목, 그리고 옆구리.
정확히 방금 부러졌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 자리였다.
눈빛이 이상했다.
안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숫자를 세는 듯한 눈.
"왜 그렇게 봐요."
"아니야."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너무 빠르게 피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말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숨기려는 사람의 말투였다.
윤소라는 구급대에 실려 갔다.
사이렌 소리가 다리 위로 울려 퍼졌다.
빨간 경광등 불빛이 강가를 붉게 물들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백설아의 눈빛도 오래 남았다.
그녀는 내 몸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마치 계좌의 잔고를 확인하듯, 아니면 무언가가 얼마나 남았는지 재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직 모르는, 아주 나쁜 것이었다.
물에 젖은 옷이 밤바람에 서서히 말라갔다.
그런데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이 서늘함은 강물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