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오후 4시 33분.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이도현은 폐공장 밖 벤치에 앉아 젖은 갑옷을 벗고 있었다.
어깨판을 풀어내는 손짓이 느긋했다.
방금까지 몬스터 셋을 손가락으로 터뜨린 사람 같지 않았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표정이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유리, 한유미와 함께 조금 떨어진 트럭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옮긴 게 아니다.
그냥 우리 셋이 먼저 걸어갔고, 이도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트럭 짐칸에 몸을 숨기듯 붙어 서서, 나는 그가 있는 방향을 힐끔거렸다.
폐공장 마당엔 부서진 컨테이너와 녹슨 파이프들이 널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멀리서 이도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구한테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웃는 사람이었다.
"확인해봐."
오유리가 말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없었다.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손을 폈다.
광성(光聖) 마법을 발현했다.
손끝에서 하얀 빛이 실처럼 뻗어 나가, 이도현이 있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었다.
그것으로 그의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빛의 실이 그의 등을 스쳤다.
그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숫자가 떠올랐다.
[잔기: 1]
숨이 멈췄다.
한 번 더 확인했다.
같은 숫자였다.
세 번째로 확인했다.
역시 1이었다.
"뭐라고 나와?"
한유미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1이야."
말하는 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남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낯설었다.
오유리의 얼굴이 굳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저번엔 2였잖아."
"그랬어."
"언제 줄었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한강대교에서였을까.
그날 이도현은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을 붙잡으려고 자기 몸을 던졌다.
난간을 넘어가는 순간, 나는 그의 등을 봤다.
아니면 던전 안에서 몬스터를 상대할 때였을까.
방금 전, 그는 셋째 몬스터의 발톱이 한유미의 목을 향해 오는 걸 보고 그 앞을 막아섰다.
발톱이 그의 옆구리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그는 웃으며 일어났다.
상처 하나 없이.
순간을 특정할 수 없었다.
그저 결과만 있었다.
2에서 1.
숫자 하나가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서웠다.
언제 줄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줄어 있는 것.
마치 계좌 잔고가 야금야금 빠져나가는 걸 보는 것과 비슷했다.
확인할 때마다 액수가 줄어 있고, 그 사이의 과정은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잔기가 0이 되는 순간, 부활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는 뜻이다.
죽어도 되살아나는 게 저주라고,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저주의 진짜 몸통은 그게 아니었다.
되살아날 때마다, 되살아날 수 있는 횟수가 하나씩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그 숫자를 이도현 본인은 모른다는 것.
"말해야 하지 않아?"
한유미가 목소리를 낮췄다.
짐칸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뭘."
"저주가 아니라, 진짜 대가가 뭔지."
오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단호했다.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걘 멈추지 않을 거야. 오히려 더 몸을 던질 거야."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도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것 외의 이유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죽어도 다시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앞장서는 게 맞죠."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 계속 숨겨?"
내가 물었다.
목이 말랐다.
물 한 잔이 간절했지만, 지금 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저주 해제 아이템을 찾으면 돼."
오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 있어?"
"없으면 만들어야지."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한유미가 짐칸 아래로 미끄러지듯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았다.
"1이면… 몇 번 남은 거야, 진짜로."
"한 번."
"한 번이라니."
한유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 번 더 죽으면, 그게 끝이라는 거잖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숫자가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오유리가 트럭 옆면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저주 건 놈을 찾아야 해. 저주를 건 존재가 있다면, 해제할 방법도 있을 거야."
"찾는다고 쳐도, 시간이 있어?"
내가 물었다.
오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4시 47분.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였다.
가벼웠다.
방금까지 몬스터와 싸운 사람의 발소리라기엔 너무 가벼웠다.
"뭐 하는 거예요?"
이도현이었다.
갑옷을 다 벗고, 편한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셔츠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얼굴에는 여느 때처럼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순간 표정을 정리했다.
손끝의 빛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가 봤을까.
못 봤을 것이다.
빛의 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작전 회의."
한유미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밝았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다음 던전 위치 정하는 거야."
"저도 껴야죠."
"아니, 넌 오늘 좀 쉬어."
오유리가 말했다.
표정을 완전히 지운 얼굴이었다.
"왜요? 저 하나도 안 다쳤는데요."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셔츠를 걷어 올려 옆구리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흉터도 상처도 없는 맨살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다치지 않았다.
갈비뼈가 부러졌던 어제 일도,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몸을 던졌던 오늘 일도, 그의 몸에는 흔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흔적이 없다는 게, 잔기가 소모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몸은 낫는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남은 시간이 줄어든다.
몸이 멀쩡하게 나을수록, 그의 숫자는 그만큼 더 조용히 깎여 나간다.
"그냥 쉬어."
나는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애썼다.
이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요. 근데 진짜 이상하네요."
"뭐가."
"셋 다 표정이 안 좋아요."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오유리, 한유미에게로 차례로 옮겨갔다.
누구도 그 시선을 오래 받아내지 못했다.
"별거 아니야."
오유리가 짧게 잘라 말했다.
"그래요? 그럼 뭐, 저 먼저 씻으러 갈게요. 몸에서 몬스터 냄새 나요."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자기 팔을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웃으며 돌아섰다.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몇 걸음 걷다가,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제가 삼겹살 사 올게요."
싱거운 말이었다.
너무 싱거워서, 오히려 더 아팠다.
"그래, 그러자."
한유미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억지웃음이 배어 있었다.
이도현이 다시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컨테이너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숫자 하나.
그게 그의 전부였다.
그 등 뒤에 붙어 있는 숫자를, 그는 절대 볼 수 없다.
나만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웃어야 할 상황이 아닌데, 입꼬리가 저절로 떨렸다.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백뿐이었다.
"우리, 어떻게든 방법 찾자."
한유미가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나보다 더 차가웠다.
"어떻게든."
오유리가 되풀이했다.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라는 말이 이렇게 공허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트럭 짐칸 너머로, 삼겹살을 사러 뛰어가는 이도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남은 숫자가 하나뿐인 사람의 발걸음이라기엔, 너무 가벼웠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저 숫자가 0이 되기 전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찾지 못하면, 그가 다음에 죽는 순간이 마지막이 된다.
그게 오늘일 수도 있었다.
내일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바로 지금, 그가 삼겹살을 사러 가는 그 길 위에서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가야 했다.
잠깐이라도, 그의 곁에서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았다.
오유리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따라가야 해."
"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그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뿐이었다.
근거 없는 예감이었다.
하지만 그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후 4시 52분.
컨테이너 사이로 사라진 이도현의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