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후 11시 15분.
병원 옥상.
한유미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울의 밤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강물처럼 흘렀다.
차 소리, 사이렌 소리, 그리고 이따금 들리는 응급실 문 열리는 소리.
병원이라는 공간은 낮이든 밤이든 완전히 조용해지는 법이 없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11월의 밤바람은 옷깃 사이로 파고들어 뼈까지 식혔다.
그래도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백설아는?"
내가 물었다.
"이도현 옆에 있어."
한유미가 대답했다.
"그래야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서울의 야경을 봤다.
한유미는 총을 손질하다 말고 나를 봤다.
손질용 천이 총구를 오가는 소리가 옥상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숨길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오늘 저녁, 백설아가 다시 광성 마법으로 이도현의 상태를 읽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백설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옅은 빛이 이도현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빛은 곧 숫자로 바뀌어 공중에 떠올랐다.
결과는 그대로였다.
[잔기: 1]
[남은 시간: 약 1개월]
숫자가 더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1개월.
30일 남짓.
그 숫자를 본 백설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 순간 백설아의 어깨가 얼마나 가늘게 떨렸는지 기억한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조용했다.
한강대교 사건 이후 처음 확인한 게 2에서 1이었다.
그때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늘 확인한 건 1개월이라는 시한부였다.
둘 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숫자로 다시 보는 건 매번 다른 무게였다.
숫자는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백설아는 계속 확인하려고 해."
한유미가 말했다.
내가 물었다.
"왜?"
한유미가 낮게 대답했다.
"혹시 잘못 본 걸까 봐."
내가 한숨을 쉬었다.
"세 번이나 봤잖아."
한유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은 거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나도 알았다.
숫자가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도, 다시 보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미련.
그 미련이 뭔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잔기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숫자는 언제나 같았다.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다시 보려고 했다.
그게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주 해제 아이템, 진짜 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한유미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손질용 천을 접었다 펴는 손짓만 반복했다.
"협회 자료에는 있어. 유니크 등급 던전 깊은 곳에. '역행의 성배'라는 이름으로."
내가 물었다.
"그게 진짜 잔기를 되돌릴 수 있어?"
한유미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내가 다시 물었다.
"본 사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한유미가 설명했다.
"기록만 있다는 뜻이야."
"100년도 더 된 기록. 그것도 목격담이지 소유했다는 증언은 아니야."
"그럼 그 던전은 어디 있는데."
"위치는 세 곳으로 추정돼. 협회에서도 정확히 특정을 못 했어."
"세 곳이라니. 그럼 시간이 얼마나 걸려."
한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질을 멈추고 총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우리가 지금 하는 게 다 헛수고일 수도 있잖아."
"그럼 뭘 해야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해줄까? 사실은 네 잔기가 하나뿐이고, 이제 한 달 남았다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걘 뭘 할 것 같아? 조용히 앉아서 그 한 달을 아껴 쓸까? 아니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몸을 더 던질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도현이라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아니라 하루가 남았어도, 그는 다치는 사람을 보면 몸을 던질 사람이었다.
그게 이도현이었다.
"넌 몰라, 유미야. 걔가 왜 그러는지."
오유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녀도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왔는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1만 년을 혼자 살았어. 누굴 구할 기회조차 없었대. 그래서 여기 와서, 겨우 그 기회를 잡은 거야. 그걸 우리가 빼앗을 수 있을까?"
오유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녀는 철퇴를 등에 멘 채였다.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며 서울의 밤을 함께 내려다봤다.
"1만 년 동안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오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야. 기회가 와도 자기 손으로 죽인 게 더 많았을 거야. 그런 존재가, 여기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렸어. 그게 걔한테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한유미가 오유리를 바라봤다.
"그럼 그냥 죽게 놔둘 거야?"
오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숨을 고른 뒤 오유리가 말했다.
"아니, 절대 아니야."
"성배를 찾을 거야. 무조건."
"그때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어."
"그럼 서둘러야지."
대화가 끊겼다.
셋 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야경을, 한유미는 자신의 총을, 오유리는 어딘가 먼 하늘을.
침묵이 길어질수록 옥상의 바람 소리만 더 크게 들렸다.
11시 27분.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유미가 화면을 확인했다.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뭐야."
오유리가 다가왔다.
한유미의 손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화면에는 문자 한 통이 떠 있었다.
[윤소라는 내가 데리고 있다. 경찰에 신고하면, 그리고 이도현이 나서면, 그 여자는 죽는다.]
발신자는 차강모였다.
나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차강모.
이도현이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한강대교 사건 이후 잠적했던 그가, 왜 지금 다시 나타난 걸까.
"이 새끼가."
오유리의 손이 철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진짜 잡았대?"
"확인해봐야지."
한유미가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사진이 한 장 더 왔다.
윤소라가 결박된 채 어딘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바닥은 시멘트, 벽은 얼룩진 벽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폐건물 안 같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강대교에서 이도현이 구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날 이도현은 몸을 던져 그녀를 물속에서 끌어올렸다.
그 대가로 잔기 하나를 소모했다.
2에서 1로 줄어든 그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다시, 이런 사진 속에 있었다.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이도현한테 말해야 해."
내가 말했다.
"안 돼."
오유리가 즉시 막았다.
"말하면 걘 당장 뛰쳐나갈 거야. 지금 몸 상태로 차강모랑 부딪치면, 잔기 하나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들 그 문장의 끝을 알고 있었다.
잔기 하나.
그게 소모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다만 다들 알았다.
그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라는 걸.
한유미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쥔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럼 우리끼리 처리해?"
"방법을 찾아야 해. 도현이 모르게."
오유리가 말했다.
"위치 추적은 가능해?"
내가 물었다.
"문자 발신 위치는 대략 나올 거야. 근데 정확한 좌표까진 시간이 걸려."
한유미가 협회 전용 단말기를 꺼냈다.
화면에 숫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신호가 잡히는 대로 위치를 특정할 거야. 30분 정도 걸려."
"30분이면 늦을 수도 있어."
오유리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럼 뭘 어떻게 해."
한유미가 되물었다.
"지금 당장 아무 데나 뛰어갈 수도 없잖아."
세 사람의 얼굴에 같은 표정이 걸렸다.
두려움과 결의가 뒤섞인, 그러면서도 이미 늦었다는 걸 아는 얼굴.
11시 41분.
병원 안, 이도현이 있는 병실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그 창문을 오래 바라봤다.
그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 채, 창밖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병실 안에는 백설아가 함께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1만 년을 혼자 살아온 존재가, 지금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 웃음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명치를 눌렀다.
나는 그 웃음을 오래 바라봤다.
저 웃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아무도 답할 수 없었다.
한유미의 단말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좌표 하나가 떠올랐다.
한유미가 단말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찾았어."
"영등포 쪽 폐공장이야."
오유리가 철퇴를 움켜쥐었다.
"가자."
내가 놀라 되물었다.
"지금?"
오유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나는 병실 창문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이도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등지고 나는 옥상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유미와 오유리가 뒤따라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세 갈래로 겹쳤다.
병실 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안의 웃음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도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사이, 우리는 그가 알아서는 안 될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정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차강모와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