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님, 저 곧 죽나요?

4화

오후 9시 03분. 강남대로 골목. 비명이 들렸다. 날카롭고 짧은 소리였다.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발바닥에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흩어졌다. 오피스텔 옥상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난간을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바람이 그의 셔츠 자락을 흔들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내 목소리가 골목을 타고 울렸다. 남자가 돌아봤다. 눈이 초점을 잃었다. 그 눈빛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 모든 걸 이미 놓아버린 사람의 눈. 나는 오피스텔 입구로 뛰어들었다. 계단을 세 층씩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7층. 숨을 쉴 수 없었다. 10층. 다리가 후들거렸다. 13층. 옥상 문이 보였다. 옥상 문을 박차고 나갔을 때, 남자는 이미 몸을 던진 뒤였다. 난간은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도 뛰었다. 난간을 넘는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바람 소리가 귀를 스쳤다. 가로등 불빛이 옆으로 흘러갔다. 남자의 몸이 앞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등을 아래로 향한 채, 팔다리를 허공에 흩뜬 모습이었다. 허공에서 남자의 옷깃을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다 주었다. 동시에 벽면에 몸을 부딪쳤다. 어깨부터 부딪쳤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내 몸이 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 지면이 가까워졌다. 5미터. 3미터. 1미터. 지면에 닿기 직전, 나는 몸을 회전시켜 남자를 위로 밀어 올렸다. 대신 내가 먼저 바닥에 부딪쳤다. 콘크리트가 등을 받아냈다. 아니, 받아낸 게 아니라 깨부쉈다. 오후 9시 09분. 등이 완전히 부서진 느낌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천장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통증이 옅어졌다. 숨이 다시 들어왔다. 시야가 맑아졌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뼈가 다시 맞춰지는 느낌. 살이 다시 이어지는 느낌. 익숙한 감각이었다. 일어났다. 몸을 툭툭 털었다. 등을 만져봤다. 멍조차 없었다. 남자는 살아 있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을 뿐, 목숨은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맥박을 확인했다. 안정적이었다. 구급대가 도착했다. 사이렌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 휴대폰을 들어 이쪽을 찍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 앉아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반사적으로 그렇게 했다. 항상 그랬다. 다치면 낫는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몸이 무거웠다. 낫긴 나았는데,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 있는 게 힘들었다. 무릎이 자꾸 꺾이려 했다. 이상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도현!" 백설아가 뛰어왔다. 숨이 가쁜 채로. 뒤로 오유리와 한유미도 따라왔다. 셋 다 표정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백설아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낫는 게 좀 오래 걸리네요." 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순간이었지만 확실했다.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오래 걸린다고?" 오유리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네. 보통 십 초, 이십 초면 되는데, 오늘은 좀 걸렸어요." 한유미의 손이 떨렸다. 총을 만지던 그 손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은데도 떨렸다. "몇 분이나?" 한유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오 분? 십 분쯤?" 그 대답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별거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 웃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몰랐다. "몸 좀 지쳤나 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유리가 백설아를 쳐다봤다. 백설아는 그 시선을 피했다. 한유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 뭔가 말없이 오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오후 9시 40분. 병원 응급실. 나는 검사를 받았다. 엑스레이. CT. 피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부러졌던 뼈도, 내출혈도 없었다.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의사가 필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목격자 진술로는 고층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 "제가 원래 회복이 빨라요." 의사는 더 묻지 않았다. 차트에 뭔가를 적고는 나가버렸다. "이상 없다는데요." 나는 대기실로 나가며 말했다. 백설아, 오유리, 한유미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백설아는 없었다. "설아 씨는요?" 오유리가 복도 끝을 가리켰다. 백설아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였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설아 씨?" 그녀가 급하게 눈가를 닦았다. 손등으로 눈 아래를 훔치는 동작이 서툴렀다. "아무것도 아니야."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울었어요?" "아니야."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상 없다니까." 그 웃음이 이상하게 슬퍼 보였다. 웃는 얼굴인데, 웃는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병원 복도의 형광등이 그녀의 얼굴을 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진짜 괜찮은 거죠?" "응." "근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어떤 표정?" "울다가 웃는 사람 같아요." 백설아는 잠깐 말이 없었다. 복도 저편에서 방송 안내음이 울렸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구하는 거 볼 때마다 그래." "제가 안 다쳤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다쳤는데, 안 다쳤다는 사실 때문에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안 다쳤어서 우는 것과, 다쳐서 우는 것.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한여름인데도 얼음장 같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나를 오래 바라봤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가를 말하려다 삼키는 표정.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그 눈빛 속에, 뭔가 말하고 싶은데 삼키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오유리와 한유미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에도 같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만 모르는 무언가. 응급실 안내판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그 깜박임 속에서, 나는 문득 오늘 낫는 데 걸린 시간을 다시 셌다. 십 초가 아니었다. 이십 초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보다 훨씬 길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자꾸 등 뒤에서 따라붙었다. 백설아의 차가운 손. 그녀의 삼킨 말. 세 사람이 주고받던 눈빛.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어디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백설아가 내 손을 살짝 쥐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가자. 늦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따라 걸었다. 병원 유리문을 나서는 순간, 밤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었다. 오늘 밤, 낫는 데 걸린 시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백설아의 눈물이. 그 눈물의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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