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녀님, 너무 늦었습니다

1화

서울 제8관문의 최심부는 조용했다. 방금까지 도끼 두 자루를 휘두르던 산양 머리의 괴물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빌 오크였다. 관문의 마지막 관문지기로 불리던 것이었고, 선발대는 그것을 쓰러뜨리는 데 꼬박 다섯 해를 바쳤다. 퍽-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먼지가 일었다. 그 먼지가 가라앉기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섯 해 동안 쌓인 침묵의 무게였다. 강도진은 방패를 내려놓았다. 팔이 저릿했다. 방패의 테두리는 온통 찍히고 눌린 흔적으로 가득했는데, 그 흔적 하나하나가 지난 다섯 해의 시간이었다. 어떤 흔적은 첫 해에 생긴 것이었고, 어떤 흔적은 바로 오늘 생긴 것이었다. 도진은 그 낡은 방패를 내려다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여전히 전투태세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오 년을 싸워온 몸은 하루아침에 풀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끝났다." 한재현이 검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여유가 묻어 있었다. 검날에 묻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지. 귀환 절차가 남았잖아." 여진서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옅은 마력의 잔광이 흩어졌다. "둘 다 입 좀 다물어. 함정이 아직 안 풀렸어." 유이현이 쪼그려 앉아 바닥의 문양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도진과 같은 고향 출신이었고, 손끝이 유독 야무졌다. 손가락 하나로 문양의 홈을 짚어가며, 그는 미간을 좁혔다. "조심해. 이 관문은 죽어서도 함정을 남겨놓는다고 들었어." "알아.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하라니까." 한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진서가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두 사람은 늘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가벼움이 오히려 다섯 해의 피로를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 이아리는 도진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성녀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며 상처를 어루만졌다. "많이 다쳤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걱정이 섞여 있었다. "괜찮습니다." 도진이 짧게 답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었다. 빛이 상처를 감쌀 때마다 살갗이 옅게 저려왔다. 도진은 그 감각을 참는 대신, 이아리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오 년 동안 수백 번은 겪은 감각이었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아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의 손을 슬쩍 쥐었다. 손끝이 맞닿는 순간의 온도를, 도진은 유난히 오래 기억했다. 다섯 해 전, 이아리가 선발대에 합류하던 날. 그녀는 도진의 방패 뒤에 숨어 첫 전투를 치렀다. 그날 그녀의 손은 떨렸고, 지팡이도 제대로 쥐지 못했다. 도진은 그녀를 등 뒤로 완전히 가리며 방패를 세웠다. 괴물의 발톱이 방패를 긁고 지나갔을 때, 이아리는 도진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삼켰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늘 도진의 등 뒤나 무릎 곁을 찾았고, 도진은 그것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공자님, 스승님이 그러셨죠. 방패는 등지고 선 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이아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습니다." 도진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 흔치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 웃음은 늘 그녀만이 끌어냈다. '방패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등 뒤에 선 자를 위한 것이다.' 도진의 스승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어릴 적, 처음 방패를 쥐었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었고, 오 년의 전장에서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이아리가 그 말을 대신 읊어줄 때마다, 도진은 스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함정 다 풀렸어." 유이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털었다. "이제 진짜 끝이야." "드디어." 여진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 귀환 포탈이 열렸다. 다섯 명은 각자 마지막 짐을 챙기며 포탈 앞에 섰다. 포탈은 은은한 청백색 빛을 뿜으며 소용돌이쳤다. 오 년 만에 보는 정상적인 포탈의 색이었다.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한재현이 여진서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둘은 일 년 전부터 연인이었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잠. 사흘은 자야겠어." 여진서가 하품하며 답했다. "난 은행부터. 손 좀 볼 데가 있거든." 유이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엔 뭔가 숨긴 계산이 있었지만, 아무도 깊이 캐묻지 않았다. "넌 뭐 할 거야, 도진아." 한재현이 물었다. "쉬어야겠지요." 도진이 답했다. "넌 항상 그 대답이야." 한재현이 웃으며 도진의 어깨를 툭 쳤다.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아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공자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은데요." 이아리가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에 도진은 잠시 멈췄다. 대답을 찾으려는 듯이었다. 다섯 해 동안 수많은 전투 속에서 오간 말들보다, 이 짧은 한마디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쿠구구- 포탈 중심부가 갑작스레 뒤틀렸다. 빛이 검게 물들며 소용돌이쳤다. 청백색이었던 빛이 순식간에 먹빛으로 뒤덮였다. "뭐야, 이거!" 한재현이 소리쳤다. 그는 검을 다시 뽑아들었지만, 벨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도진아!" 유이현의 외침이 들렸다. 그의 목소리엔 처음 듣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공자님!" 이아리가 손을 뻗었다. 도진의 발밑이 무너지듯 꺼졌다. 검은 소용돌이가 그의 몸을 삼켰다. '잡아야 한다.' 그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이아리의 손가락이 닿았다. 딱 한 순간, 서로의 온도를 느꼈다. 그 온도는 조금 전 상처를 어루만지던 그 손과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이었다. 손이 미끄러졌다. "안 돼!" 이아리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도진!" 여진서의 지팡이가 허공을 갈랐지만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시야가 완전히 검게 덮였다. 소리도 사라졌다. 다섯 해를 함께한 목소리들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 눈을 떴을 때, 도진은 낯선 천장을 보고 있었다. 흰색 벽, 알 수 없는 기계 소리,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피는 몇 명의 사람들. 그들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판을 들고 있었다. 판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그 불빛을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뭔가를 넘기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생체 신호 안정적입니다. 놀랍네요, 오십 년 전 데이터랑 거의 일치합니다."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오십 년이요?" 첫 번째 사람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방식으로 완전한 상태로 회수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도진은 상체를 일으켰다. 근육 하나 뻐근하지 않았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팔뚝을 내려다봤지만, 방금 전까지 이아리가 어루만지던 상처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서울입니다. 정확히는, 서울 던전관리청 산하 회수 센터죠." 흰 가운의 여자가 답했다. 그녀의 눈빛엔 경계와 흥미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판을 도진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확인했다. "이름을 확인해도 될까요." "강도진입니다." "강도진..." 여자가 판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기록에 있는 이름이네요. 서울 제8관문 선발대." 그 말에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빛엔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내 동료들은." 도진이 물었다.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조금 복잡합니다." '복잡하다는 말은 좋지 않은 신호다.' 도진은 그렇게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명치를 짓눌렀다. 바닥은 차갑고 매끈했으며, 그가 알던 어떤 바닥과도 달랐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짜가 언제입니까." 여자가 물었다.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관문 공략을 마친 날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어쨌든, 그날입니다." 여자는 판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다른 이들도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날짜로부터, 오십 년이 지났습니다."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기계 소리만이 공백을 채웠다. 삐- 삐- 하는 일정한 소리가 그 침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오십 년.' 그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다섯 해를 함께한 동료들의 얼굴이 스쳤다. 이아리의 손끝. 재현의 웃음. 진서의 지팡이. 이현의 계산적인 눈빛. 포탈 앞에서 자신을 붙잡으려던 손들, 그리고 그 손들이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던 순간. "제 동료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도진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정했지만, 그 안에 처음으로 균열이 느껴졌다. 여자는 판을 손에 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며 도진을 마주 보았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상급자가 따로 설명드릴 겁니다." 그것으로, 그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는 것을 그는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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