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네가... 보라를 이렇게 만든 놈이냐."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병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여자는 병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설아 언니! 아니야, 이 아저씨는..." 보라가 다급히 말리려 했지만, 여자의 발이 이미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여자가 설아였다. 윤설아. '설야' 길드 소속의 검술 고수였고, 보라와는 언니 동생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붉게 물든 눈가, 흐트러진 옷자락, 뛰어온 흔적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병실까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짐작이 갔다.
"입 다물고 있어." 설아가 보라를 향해 짧게 말했다. 보라를 향할 때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도진을 향한 순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당신, 방송 봤어. 보라 다리를 저렇게 만들어놓고 병실까지 쫓아와서 뭘 하려는 거지." 설아가 레이피어 끝을 도진에게 겨눴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드는 동작이 매끄러웠다. 낭비되는 움직임이 없었다. 실전에서 수없이 검을 뽑아본 자만이 낼 수 있는 매끄러움이었다.
"오해입니다. 저는 서보라 씨를 구한 사람입니다." 도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거짓말." 설아의 눈에 확신이 서렸다. "방송에서 봤어. 함정이 작동한 직후, 낯선 남자가 뛰어들었지. 그 이후 보라의 다리는 저렇게 됐고. 그 남자가 당신 아니야?"
"그건 제가 그녀를 구하려다 생긴 상처입니다."
"믿을 수 없어." 설아가 발끝으로 바닥을 밀며 자세를 낮췄다.
레이피어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흥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떨림 속에도 정확한 궤도가 살아 있었다.
'대화로는 안 되겠군.' 도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설아의 자세는 이미 실전을 앞둔 검사의 그것이었다. 몸의 중심, 검 끝의 흔들림 없는 각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상급 관문지기와 비슷한 수준의 기도다.' 그는 속으로 덧붙였다. 다섯 해 동안 관문 안에서 수많은 검사들을 봐왔다. 그 경험이 지금 그의 눈앞에 선 여자의 위험도를 즉각 계산해내고 있었다.
"언니, 진짜야! 이 아저씨가 나 구해준 거야!" 보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없는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너졌다.
쿵-
침대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보라야!" 설아가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틈이었다.
검을 겨눈 자세가 흔들리는 순간, 상대의 시선이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무예를 아는 자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기회였다.
하지만 도진은 그 틈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천천히 들어 보였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설아가 다시 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보라를 다시 침대에 눕히면서도, 검을 든 손만은 도진에게서 떼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시죠. 여기서 싸우면 그녀가 다칩니다." 도진이 병실 문 쪽을 가리켰다.
설아는 잠시 도진을 노려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가서 얘기하자고."
보라가 뭐라 외치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병실을 나선 뒤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병원 뒤편의 좁은 골목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고, 설아는 그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병원 시설을 미리 파악해둔 것인지, 아니면 감각적으로 찾아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건물 사이로 좁게 뻗은 골목은 양옆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었다. 뒤로 물러설 공간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자, 이제 말해봐. 왜 보라 다리를 그렇게 만들었지." 설아가 레이피어를 다시 겨눴다.
"이미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구했을 뿐입니다. 함정에 빠진 걸 끌어올렸고, 그 과정에서 다리가 다쳤습니다."
"그럼 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지원팀이 도착하기까지 십 분이나 걸렸다던데, 그 시간 동안 당신 혼자 있었잖아."
"제가 먼저 도착했을 뿐입니다."
"우연이라고?" 설아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에 그런 우연은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을 넘어선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마치 이미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증명할 방법만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믿지 않는다.' 도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결론이 서 있었다. 대화로는 풀 수 없는 종류의 확신이었다.
방패 뒤에서 다섯 해를 보내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말로 안 통하는 상대에게는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
"그럼 어떻게 해야 믿겠습니까." 도진이 물었다.
"방법은 하나야." 설아가 검을 들어 올렸다.
스릉-
레이피어가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내가 이기면, 당신은 순순히 관리국에 넘겨져서 조사를 받는 거고." 설아가 자세를 잡았다. "진 다음에 도망치는 건 용납 안 해."
"싸우고 싶지 않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 말은 이제 안 통해."
설아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쉭-
레이피어가 도진의 목을 향해 곧게 뻗어 들어왔다. 빠르고 정확한 찌르기였다.
도진은 상체를 살짝 비틀며 그것을 피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섯 해 동안 방패 뒤에서 익힌 감각이었다.
'속도는 예상보다 빠르다.' 그는 즉각 판단을 수정했다. 처음 자세를 봤을 때 짐작한 것보다 한 수 위였다.
"피했다고 끝난 게 아니야." 설아가 곧바로 자세를 바꾸며 두 번째 찌르기를 넣었다.
쉭-
이번에는 노리는 위치가 달랐다. 옆구리였다. 도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등이 골목의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습기 찬 벽면이었다.
'퇴로가 없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방패도 없는 지금, 이 좁은 골목에서 저 속도의 검을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관문 안에서라면 방패를 세우고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몸으로 검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패 없이도 그렇게 잘 피하네. 그럼 이번엔 어떨까." 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검 끝에서 옅은 빛이 스멀거렸다. 마나를 담기 시작한 것이었다.
푸른 기운이 검신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그 빛이 짙어질수록 골목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잠깐, 대화로 풀 수 있습니다." 도진이 다시 손을 들어 보였다.
"이미 늦었어." 설아가 답했다.
그녀의 검 끝이 마나로 물들며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변했다. 이대로라면 단순히 피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마나가 실린 찌르기는 살점을 뚫는 정도가 아니라 뼈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골목 저편의 지하 배수구에서, 무언가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쿠구구-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아의 검 끝이 흔들리며 잠시 멈췄다.
"뭐야, 지금..."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검을 겨눈 자세는 그대로였지만, 시선은 배수구 쪽으로 반쯤 돌아가 있었다.
도진의 감각이 그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다섯 해 동안 관문 깊은 곳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파장이었다. 관문지기급,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의 기척.
'이건... 관문 안에서 느꼈던 그 기운이다.'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패를 들고 서 있던 시절,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을 느낄 때마다 각오를 다졌었다. 저것이 다가온다는 것은 곧 누군가가 죽거나, 누군가가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버텨야 한다. 물러서면 뒤에 선 사람이 죽는다.' 그 가르침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방패도 없이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그 기척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배수구 뚜껑이 안쪽에서부터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쇠가 긁히는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끼기긱-
낡은 철제 뚜껑이 삐걱거리며 조금씩 벌어졌다. 그 틈으로 어둠보다 짙은 무언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설아의 검이 도진을 겨눈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검을 든 손에 힘이 실렸지만, 겨누는 방향은 더 이상 확신이 없었다.
"뒤로 물러서요." 도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명령에 가까운 무게가 담겨 있었다.
"뭐?" 설아가 되물었지만, 도진은 이미 배수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겨누던 검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산양을 닮은 뿔이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