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방과 후 그 폐동굴로 향했다. 몸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그 통증조차 잊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문을 나설 때마다 습관처럼 주변을 살폈다. 박태준 무리가 어디 있는지,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그 시선들을 피해 최대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임무였다. 다행히 요즘은 운이 좋았다. 아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내가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뿐이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게 다행이라니. 이 학교에서의 내 위치가 딱 그 정도였다.
폐동굴로 이어지는 산길을 오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옷깃이 스칠 때마다 짜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 통증도 어느 순간부터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통로 끝, 그 어두운 방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오히려 설렘으로 채워지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그 공간이, 지금은 하루 중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
슬라임과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보다 훨씬 수월했다. 이제 나는 그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슬라임 역시 내가 다가오는 소리만으로도 몸체를 부풀리며 반응했다. 마치 반가움을 표현하는 강아지처럼.
"나 왔어." 나는 통로 끝 방에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슬라임이 살짝 튀어 오르듯 몸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의 의미가 손을 대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기쁨. 반가움.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을까 봐 조바심 내던 존재가,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를 들은 것처럼.
손끝을 표면에 대자 다시 그 언어가 흘러들어왔다.
[왔어! 오늘도 왔어!]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오늘 하루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은 순간이었다. 학교에서는 웃을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아침 조회부터 방과 후까지, 웃을 일이라고는 찾아보려 해도 없는 하루였는데, 겨우 이 축축한 동굴 안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몬스터와 손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에서야 처음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진짜네. 진짜로 대화가 되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실을 검증하고 싶었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게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이거나,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면, 나는 그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여러 방식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손을 떼고 말을 걸었을 때는 반응이 있는지, 손을 대고 있을 때만 언어가 전달되는지, 슬라임이 어떤 감정 상태일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손을 떼고 말을 걸었을 때, 슬라임은 몸짓으로만 반응했다. 몸을 부풀리거나, 살짝 흔들리거나, 표면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감정의 파편은 여전히 손끝에서 전해졌지만, 명확한 문장은 접촉이 있을 때만 형성됐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맞을 때만 신호가 잡히는 것처럼.
손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어? 다시 왔어?] 하는 반응이 왔다. 나는 그걸 다섯 번, 열 번 반복했다. 매번 똑같았다. 손을 떼면 언어가 사라지고, 손을 대면 다시 흘러들어왔다. 우연이라면 이렇게까지 일관될 수는 없었다.
"너, 배고파?" 나는 근처에서 주워온 나뭇잎을 슬라임 앞에 놓아보며 물었다.
슬라임이 그 나뭇잎에 살짝 몸을 밀착시켰다. 표면에 손을 대자 답이 왔다.
[이건... 안 먹어. 이건 못 먹어.]
"그럼 뭘 먹어?"
[모르겠어.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
나는 그 대답에 잠시 멍해졌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은, 이 슬라임도 이 던전이 생성된 것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존재는 나만큼이나 이 낯선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당황이라는 감정을, 슬라임이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몬스터라는 존재를 게임 속 몹, 사냥감, 경험치 덩어리로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슬라임은, 자기가 뭘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 낯선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도 못 잡은 채 그냥 존재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나도 그래." 나는 웅크려 앉으며 말했다. "나도 이런 거 처음이야. 근데... 너랑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진짜 신기해."
슬라임이 몸을 부풀리며 진동했다. 그 진동에서 전해지는 감정은 명확했다. 안도감. 마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 같은.
며칠간 반복된 이 만남을 통해 나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 번째, 이 스킬은 접촉을 통해서만 명확한 언어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손을 떼는 순간 그 언어는 곧바로 사라졌고, 다시 손을 대면 곧바로 돌아왔다.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정확하게.
두 번째, 슬라임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존재의 내면은 인간보다 훨씬 투명했다. 기쁘면 기쁘다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무 필터 없이 그대로 전해졌다. 학교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그 이중적인 표정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소통 능력이 재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한 번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진짜 능력이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스트레스성 환각도 아니었다. 확실했다.
"고하응." 어느 날 슬라임이 그런 단어를 전해왔다. 정확한 번역이 되지 않는 감각이었지만, 분열하고 싶다는 욕구와 동시에 존재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이해됐다.
"분열하고 싶은 거야?" 내가 물었다.
[그러고 싶어. 근데... 혼자 남는 게 무서워. 나눠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슬라임의 존재론적 고민이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한 영역이었으니까. 인간은 세포 분열을 통해 새로운 개체를 만들지 않는다. 나눠진다는 것, 그것으로 자신이 둘이 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나눠지면, 나는 사라지는 거야? 아니면 두 명이 되는 거야?]
슬라임이 다시 물었다. 그 질문 안에 담긴 불안이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심장이 조금 저릿했다. 나도 모르는 답을 요구받은 기분이었다.
"모르겠어. 나도 그건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확실한 건, 네가 뭘 선택하든 나는 계속 여기 올 거야."
슬라임이 조용히 진동했다. 하지만 이 대화 자체가 나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몬스터에게도 감정이 있다. 몬스터에게도 두려움과 욕구와 존재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데 세상은 몬스터를 그저 사냥해야 할 대상, 처치해야 할 자원으로만 취급한다.
박태준이 헤라클의 다리를 하나씩 뜯을 때, 그 곤충에게도 이런 내면이 있었을까. 두려움이,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을까. 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그 곤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려달라고 빌었을까, 아니면 그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을까. 나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확신이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을 밀어 올렸다.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 능력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슬라임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에... 사람들이 너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질까?"
슬라임이 조용히 진동했다. 그 진동에서 전해지는 감정은 희미한 희망이었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뭔가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렸다. 이 능력이 그저 나만 아는 신기한 비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몬스터들의 진짜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어쩌면 박태준 같은 놈들도, 몬스터를 그저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짓을 그만두게 될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매일 짓밟히기만 하던 내가, 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만큼은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감각.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하지만 그 벅찬 감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눈앞에 또 다른 창이 떠올랐다.
[경고: 던전 안정도 하락 중.]
[현재 안정도: 34%]
[예상 소멸 시점: 약 7일 후.]
나는 그 문구를 보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7일. 이 신비한 공간이, 이 슬라임과의 대화가, 겨우 일주일 뒤에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안정도라는 숫자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그 끝은 소멸일 터였다. 이 방도, 이 슬라임도, 그리고 이 능력을 처음으로 확인해준 이 공간 자체도.
씨발, 겨우 이제야 찾았는데. 이제야 뭔가 좀 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7일 안에 뭘 할 수 있을까. 이 짧은 시간 안에 이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아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이 슬라임은, 던전이 소멸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순간, 그 순간 슬라임의 몸체가 갑자기 세게 떨렸다. 표면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그 떨림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소름으로 번졌다.
두려움. 그리고 뭔가 낯선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계심.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슬라임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첫 만남 때 나를 공격하려 했던 그 순간보다도 지금이 더 불안정해 보였다.
"왜 그래? 뭐가 있어?"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슬라임의 몸이 계속 떨렸다. 표면에 다시 손을 얹었다.
[온다... 뭔가 와... 무서워...]
나는 조심스레 통로 쪽을 돌아봤다. 동굴 입구 방향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인기척이 어렴풋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였다.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