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잘렸더니 감정사 만렙이라니

2화

고용센터라는 곳은 참으로 기이한 무림맹이었으니, 그곳에 들어선 자마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본좌는 번호표를 뽑고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대략 이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인파가 초조한 낯빛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 게시판에는 붉은 숫자가 쉼 없이 바뀌었으니, 그것이 마치 전장의 사상자 명단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군웅할거*로다.' *군웅할거: 여러 영웅이 각지에서 세력을 다투는 모양. 여기서는 실업자들이 몰려든 풍경을 비유. 옆자리에 앉은 청년은 스마트폰이라는 전서구를 두드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그 옆의 아낙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서류 봉투를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하였다. 본좌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곳은 실로 패자들의 집합소였으니, 승자란 존재하지 않는 싸움터였다. 본좌의 번호가 불렸다. 창구 직원이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경력이... 도시경비회사 15년이시네요. 다른 자격증은 없으세요?" "본좌는 【감정】이라는 스킬을 지녔소이다." 직원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헌터 등급 스킬인가요?" "아니, 그것은 아니오만.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이외다." "그럼 관련 자격증이 있으세요? 감정평가사 자격증 같은 거요." "...자격증이라 함은 없소이다. 이것은 본좌가 어릴 적부터 타고난 눈이니, 종이 쪼가리로 증명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직원은 잠시 본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럼 취업 지원 목록에 없는 스킬이라 활용이 어려워요. 혹시 지게차 자격증이나 컴퓨터 활용능력 같은 건 없으세요?" 본좌는 말문이 막혔다. 15년 밥벌이의 근간이었던 힘이, 이 무림맹의 규율 앞에서는 종이 한 장의 값어치도 안 되는 것이었다. 도시경비회사에서 게이트 초소를 지키며 수백, 수천의 마물과 유물을 감정해 낸 그 세월이, 이 창구 하나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오?" "일단 실업급여 신청부터 해드릴게요. 서류 작성하시고, 교육 이수하시면 됩니다." 실업급여라는 곳납은 신청하는 데에만 이레*가 걸렸다. 서류를 세 번이나 다시 써야 했고, 온라인 교육이라는 것을 들으라 하여 컴퓨터방까지 찾아가야 하였다. 그마저도 매달 얼마 안 되는 금액이 통장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으니, 본좌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레: 일곱 날. *** 보름이 흘렀다. 통장 잔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본좌의 이력서는 예순 곳이 넘는 곳으로 흩어졌으되 돌아오는 답신은 거의 없었다. 몇 군데는 서류조차 열어보지 않은 듯 침묵으로 답하였고, 두어 곳에서는 형식적인 거절 문자만 날아왔다. [귀하의 역량은 충분하나 당사와는 결이 맞지 않아...] 본좌는 그 문구를 읽을 때마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결이 맞지 않는다니, 이는 실로 애매모호한 언사였으니, 본좌를 거두지 않겠다는 말을 참으로 우회적으로 돌린 것이었다. '참으로 사고사려*로다.' *사고사려: 죽을 각오로 살길을 도모함. 절박한 상황을 이름. 편의점 삼각김밥 값도 이제는 아까워지는 지경이었다. 본좌는 참치마요보다 값싼 그냥 참치 삼각김밥을 집었다가, 다시 진열대에 내려놓고 유통기한이 임박하여 반값 할인 스티커가 붙은 것을 골랐다. 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인가. 하루는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로 저녁을 때우고 인천 앞바다를 걷고 있었다. 본좌 나름의 수련이자 사유의 시간이었다. 바닷바람은 짜고 습했으며,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는 소리가 마치 본좌를 비웃는 듯하였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강도현?" 돌아보니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얼굴엔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새겨진 자였다. 손등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으니, 이는 게이트 초소 시절 본좌도 익히 알던 상처였다. "박태식... 형님?" 본좌의 입에서 절로 반가움 어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박태식은 예전 게이트 초소 시절, 본좌를 아껴주던 몇 안 되는 선배였었다. 그가 초소를 떠난 뒤로는 소식조차 듣지 못하였는데, 이런 곳에서 재회할 줄이야. "야, 소문 들었다. 잘렸다고?"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본좌는 위엄을 유지하려 했으나, 오랜만의 반가움에 그마저도 흐트러지고 말았다. 어깨에 힘을 주어 고개를 세우려 했으되, 목소리는 이미 반가움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박태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 "별다른 것 없이... 이력서만 넣고 있습니다." "이력서 넣어서 되겠냐, 나이도 그만 한데." 박태식의 말투는 무뚝뚝했으나, 그 안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본좌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 사내는 예전에도 말은 거칠되 마음은 따뜻한 자였으니, 그 성정이 세월에도 변치 않았음이 반가웠다. "형님은 지금 뭐 하십니까?" "나? 인천 제3부두. 던전 폐기물 회수반이다." 던전 폐기물 회수반. 그것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본좌는 즉각 감이 오지 않았다. 본좌의 머릿속에서는 그 이름이 마치 어느 산문에 숨어 폐병기를 수집하는 은둔 문파처럼 들렸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잡동사니들 모아서 감정하고 파는 일이야. 이제 자동화 안 된 몇 안 되는 노동집약 업종이지." "...그것이 밥벌이가 됩니까?" "운 좋으면 하루에 몇십만 원도 벌어. 운 나쁘면 하루 종일 폐철만 만지다 끝나고." 박태식이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는, 연기 사이로 본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옛 동료를 향한 그리움과, 지금의 초라한 행색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너, 예전에 감정 스킬 있었잖냐. 물건 보는 눈 좋았던 거 기억난다. 그때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들, 니가 감정해서 등급 매기면 위에서 딴말 못 했잖아." "...예. 아직 있습니다. 그 눈은 여전하외다." "그럼 내일부터 나와봐라. 사람 하나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본좌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재기의 기연*이던가. 보름간의 절망 끝에 이렇듯 손을 내미는 자가 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기연: 기이한 인연. 뜻하지 않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이름.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는 됐고. 대신 시급제니까 기대는 하지 마라. 그리고—" 박태식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거긴 사람 취급 잘 안 해주는 데다. 니가 사무직 출신이라고 하면 아마 무시당할 거야. 각오하고 와라." 본좌는 그 말의 무게를 그때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저 재취업의 기쁨에 눈이 흐려져, 앞으로 닥칠 시련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본좌가 무시를 당한다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본좌는 15년 밥벌이를 감정 하나로 버텨온 자이니, 그깟 부두 노동자들이 감히—" "...말투부터 좀 고쳐라. 거기 사람들 그런 거 되게 싫어해." "...예? 어찌 고치라는 말씀이오?" "그냥 평범하게 말하란 소리다. 본좌니 뭐니 하는 거, 거기서는 미친놈 취급받을 거다." 박태식은 픽 웃으며 돌아섰다. 그 웃음에는 걱정과 재미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본좌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약하였다. 파도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채웠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서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문자 알림이었다. [제3부두 던전 회수반 - 내일 오전 6시 출근. 안전화, 장갑 지참.] 본좌는 그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문파에 입문하는 것이었다. 안전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장갑은 또 어떤 종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본좌의 머릿속은 실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신발장을 뒤져보니, 예전 초소 근무 시절 신던 낡은 워커 한 쌍이 있었다. 본좌는 그것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며, 마치 오랜 벗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가슴 한편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박태식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경고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던 것이다. '사람 취급 잘 안 해주는 데다...' 이 던전이라는 곳에서, 본좌의 잊혔던 【감정】이 어떤 얼굴을 드러낼 것인지, 그때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다만 창밖으로 스며드는 어스름 속에서, 본좌는 낡은 워커를 끌어안은 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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