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단약원 정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쇳내가 올라왔다. 혀뿌리에 감도는 비릿한 맛. 5년 전 궁에서 강제로 삼킨 액령단의 독기가 아직도 뼈마디를 갉아먹고 있었다. 밤마다 뼈가 안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태의는 마지막 진맥을 마치고 손을 떼며 이렇게 말했다.
"닷새."
그것이 내게 남은 시간이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나는 내 죽음의 날짜를 알고 살아가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나는 황자였다. 구성무사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으며 궁의 무학관에서 검을 배웠다. 스승들은 내 손목의 회전이 남다르다 했고, 형제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형제간의 권력 다툼에서 나는 패자가 되었고, 그 대가로 액령단을 강제로 삼켜야 했다. 몸속에서 서서히 타오르는 독. 그것이 내 형벌이었다.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 형벌.
버려진 나를 거둔 것이 백현조였다.
노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간 같지 않은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등은 굽지 않았고, 눈빛은 형형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궁의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나를 거두어 5년을 살려주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5년 동안 나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도 캐묻지 않았다. 캐물을 자격이 없었다.
"세정단이 있으면 액령단의 독을 풀 수 있다."
그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세상에 그런 영단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단약원의 999계단을 오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백현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마차 안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세를 바라보며 남은 숨을 세었다.
단약원은 강남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연단가의 성지였다. 신비로운 약재와 영단을 다루는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으며, 세정단은 그 안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로 알려져 있었다. 산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의 냄새가 달랐다. 약재 달이는 냄새, 흙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서늘한 영기. 산 정상에 위치한 연단각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999개. 그것을 완주한 자만이 원주의 알현을 받고, 원하는 단약 하나를 청할 자격을 얻는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닷새 안에.
오늘이 그 시험의 날이었다.
"규정은 간단하다."
계단 앞에 선 집행장로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른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붉은 관복을 입고 있었고, 눈매는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이름은 홍채원이라 했다. 그녀 뒤로는 계단을 오르려는 다른 참가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나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였고, 팔뚝에는 단단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999계단을 오르는 데 지팽이도, 조력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직 네 두 다리로."
그녀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병색이 짙은 얼굴, 마른 팔다리.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손목은 뼈가 그대로 만져질 정도로 앙상했다. 시험에 참가한 다른 자들과 비교하면 나는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을 것이다.
"몸 상태를 보니 시작도 전에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녀가 낮게 내뱉었다. 조소가 섞인 어조였다. 주변에서 몇몇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도 아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모할 수 있는 숨의 양조차 계산해야 했다.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숨이 턱 막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백현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가라, 현서야."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등에 새기듯 받아들이며 두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계단은 처음 백여 개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종아리에 힘이 남아 있었고, 호흡도 그럴듯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백을 넘어서자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발목을 들어 올릴 때마다 관절 속에서 모래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삼백을 넘어서자 시야가 흐려졌다. 계단의 경계가 뭉개져 하나의 회색 덩어리처럼 보였다. 숨을 쉴 때마다 명치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쳐 올라왔다. 그것은 독기였다. 몸속에서 잠자던 액령단의 독이 격렬한 움직임에 반응해 요동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삼백일흔둘. 삼백일흔셋.
숫자를 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다. 숫자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오백 계단을 넘어설 무렵,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발을 딛는 게 아니라 던지는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한 번은 무릎이 완전히 꺾이며 계단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혔다. 통증조차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넘어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시간은 태양의 위치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오전 내내 걸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칠백을 넘어서자 눈앞에 검은 점들이 떠다녔다.
죽는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떠올랐다. 여기서 죽는다면, 세정단을 구하지 못한 채 닷새가 지나기 전에 이 계단 위에서 숨이 끊어질 것이다. 산 위에서 죽은 시체를 누가 치워줄까. 그런 하찮은 생각까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치솟았다.
분노였다.
나를 버린 궁정에 대한 분노. 나를 짓밟은 형제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지금, 이 계단 앞에서 나를 조소하던 홍채원이라는 여인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죽어도 저 여인 앞에서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오기가 독기보다 더 뜨겁게 명치를 지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팔백을 넘어섰을 때, 나는 더 이상 숫자를 세지 않았다. 숫자를 셀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몸을 던지듯 계단을 올랐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그 비명을 무시했다. 손바닥으로 계단 난간을 짚을 때마다 나무의 거친 결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구백을 넘어섰을 때,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계단 위로 길게 드리워졌고, 나는 그 그림자 속을 걸었다.
마지막 백 계단.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계단 손잡이를 붙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몸을 지탱하는 것은 다리가 아니라 오직 정신력이었다. 눈앞이 몇 번이고 캄캄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구백구십.
구백구십오.
마지막 몇 계단은 거의 기어오르듯 올랐다. 손톱 밑에서 피가 났는지 감각이 없었다. 무릎으로 계단을 짚을 때마다 옷자락이 젖어드는 느낌이 났다. 피인지 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구백구십구.
그리고.
마지막 계단.
나는 그 위에 발을 올렸다.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원래 색을 되찾았다. 귓속에서 울리던 이명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올랐다.
999계단을.
닷새라는 시한 속에서, 나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느린 발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홍채원이 서 있었다. 붉은 관복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조소도, 놀람도 없었다. 대신 무언가 계산된 듯한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구나."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발끝이 계단을 딛는 소리가 하나씩, 마치 셈을 하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걸음걸이에서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여인은 지금 내가 통과한 것을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런 확신이 본능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몸은 지쳐 있었고, 반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두 다리는 이미 감각을 잃은 채 계단 위에 무너져 있었고, 팔조차 나를 지탱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발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