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상에 도착한 순간의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999계단.
숫자로만 들으면 별것 아닌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오른 자는 안다. 마지막 백 계단부터는 다리가 아니라 정신력으로 오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허벅지는 이미 감각을 잃었고, 폐는 불에 타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 계단에 발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됐다. 살았다. 그 생각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홍채원의 발이 내 어깨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반응할 수 없었다. 온몸의 힘을 다 쏟아부어 999계단을 오른 직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으로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발끝이 다가오는 궤적을. 그러나 몸은 그 정보를 명령으로 바꾸지 못했다.
퍽!
둔탁한 충격이 어깨에 박혔다.
나는 그대로 계단 밖으로 밀려 떨어졌다.
"어, 어어…"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발밑에 있던 단단한 돌바닥이 사라지고, 대신 허공이 나를 감쌌다. 세상이 순식간에 기울었다.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계단이 이제는 머리 위에 있었다.
추락.
999계단의 정상은 그 자체로 절벽이었다. 연단각이 세워진 봉우리는 사방이 급경사로 둘러싸여 있었고, 계단의 마지막 지점은 그 절벽의 끝자락과 맞닿아 있었다. 처음 이 계단을 오를 때 누구도 그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알 겨를이 없었다. 알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었을까. 홍채원이 내 어깨를 걷어차는 순간에는.
바람이 귓가를 찢을 듯 스쳤다. 몸이 회전하며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시야가 뒤엉킨 색채로 흩어졌다. 푸른 하늘과 회색 절벽이 번갈아 스쳤다. 시야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홍채원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벌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계산된 폭력.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 999계단의 끝이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무지를 이용해 나를 밀었다.
왜.
의문이 스칠 틈도 없이, 추락하는 몸이 가속했다. 절벽 아래로 이어진 나무들이 순식간에 시야를 채웠다. 초록빛 잎사귀가 뾰족한 창날처럼 다가왔다.
죽는다.
그 생각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세정단도, 복수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서 끝난다. 이렇게 허무하게. 궁을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직 아무것도 갚지 못했는데.
숨이 턱 막혔다. 마른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그것으로 끝일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가 나를 붙잡았다.
강한 힘이 팔목을 움켜쥐는 감각.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아프다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멈췄다는 사실이 감각을 채웠다. 추락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며, 나는 마치 거대한 손바닥에 붙잡힌 것처럼 허공에서 멈춰 섰다.
관성이 몸을 한 번 크게 흔들었다.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나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 백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현조.
그가 어느새 절벽 아래 허공에 떠 있었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공기 자체를 밟고 선 것 같았다.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데도 그의 몸은 흔들림이 없었다. 인간의 움직임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괜찮으냐."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그러나 나를 붙잡은 손의 힘은 결코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팔목을 쥔 그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그가 지금 얼마나 손쉽게 내 목숨을 쥐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눈에 담겼던 죽음의 풍경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듯했다. 손끝이 떨렸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안은 채 절벽 옆의 좁은 바위틈으로 내려섰다. 발이 단단한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주저앉은 채로 바위틈의 축축한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그 서늘한 감촉이 그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살, 살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온몸이 떨렸다. 방금 겪은 죽음의 감각이 아직도 살가죽에 남아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나는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백현조는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맑고 차분했다. 그러나 무언가 결심한 듯한 그늘이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그때였다.
바위틈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부스러기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다음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조심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은근한 살기를 감추지 못하는 걸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절벽 위, 우리가 있는 바위틈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한 사내가 내려오고 있었다. 단약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감시무사였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예리하게 우리를 훑고 있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확인하러 온 듯한, 그런 여유가 배어 있는 눈이었다.
"쥐새끼처럼 숨었나."
사내가 낮게 내뱉었다.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홍채원의 명을 받고 뒤처리를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처음부터 이 절벽 아래에 감시무사를 대기시켜 두었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죽지 않고 떨어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철저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목격자는 남기지 않는다는 방침이지."
사내가 칼을 뽑았다. 쇳소리가 좁은 바위틈에 날카롭게 울렸다. 그 끝이 나를 향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금 전 겪은 추락의 공포가 아직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칼끝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백현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검이 어디서 나왔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손에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나 있었다.
그가 검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손잡이의 무게가 손바닥에 낯설게 느껴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현서야."
그가 낮게 불렀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자를 살려 보내면,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담담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죽여라."
나는 검을 든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궁에서 검을 배울 때조차 목검으로만 연습했다. 사람의 살을 벤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사내의 발이 바위틈의 좁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그의 얼굴에 어린 살기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면 피할 곳도 없었다. 뒤는 절벽이었고, 옆은 백현조가 서 있었다.
칼끝이 눈앞으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