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어야 사는 황자

4화

단약원 본전 앞.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돌바닥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얇은 서리가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나는 백현조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단순한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의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검을 쥐었던 손, 심장을 관통하던 순간의 무게. 살이 갈라지던 소리, 뜨거운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감촉까지도 선명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이 다시 재생됐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나는 몇 번이나 숨을 삼켰다. 앞서가는 백현조의 등을 보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그 창백한 뒷모습조차도 어젯밤의 잔상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본전 안은 향내로 가득했다. 단약을 조제할 때 쓰는 약재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씁쓸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기둥마다 새겨진 문양이 흐릿한 등불에 일렁였다. 중앙에는 커다란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 조정헌이 앉아 있었다. 중년의 남자였다. 관을 쓰고 있었고, 표정에는 미세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눈빛만이 나를 훑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곁에 홍채원이 서 있었다. 붉은 관복이 그녀의 매서운 눈매와 어우러져 더욱 도드라졌다. 입가에 조소가 걸려 있었다. 어제 그 절벽 위에서 나를 걷어차던 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손끝으로 관복의 소매를 매만지는 그녀의 여유로운 몸짓이, 이 자리를 이미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현서." 조정헌이 낮게 불렀다. "예."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어젯밤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라." 나는 숨을 골랐다. 목이 말랐다. 입술이 갈라질 듯 뻣뻣했다. 그러나 말은 막힘없이 나왔다. "999계단을 완주한 뒤, 집행장로께서 저를 절벽 아래로 걷어차셨습니다." "떨어지는 저를 은인께서 붙잡아 구해주셨습니다." "바위틈에서 감시하던 이성무사 한 명이 저희를 습격했고, 저는 부득이 그를 죽였습니다." 말을 마치자 본전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향내를 태우는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조정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홍채원에게로 옮겨갔다. "장로." 홍채원이 앞으로 나섰다. 걸음걸이가 여유로웠다. 발소리조차 절제된 리듬을 갖고 있었다. "삼전주님, 저 아이의 말은 절반만 진실입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가 저 아이를 걷어찬 것은 맞습니다."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999계단 정상은 시험의 일부입니다. 정상에 오른 자가 절벽 앞에서 스스로 물러날 줄 알아야 진짜 자격을 얻는 것이지요. 그 아이는 물러나지 못했으니,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억지로 짜맞춘 궤변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정헌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런 논리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홍채원이 내 말을 잘랐다. "제가 배치해둔 감시무사는 절벽 아래에서 낙오자를 구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가 먼저 그 무사를 죽였습니다." 거짓이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졌다. 주먹을 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거짓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그 무사는 저를 죽이러 왔습니다. 검을 뽑고 먼저 달려든 쪽은 그였습니다. 목을 노리고 찔러들어온 검을 제가 막아섰을 뿐입니다." 조정헌의 시선이 나와 홍채원 사이를 오갔다. 판단을 내리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형식만 갖추는 눈이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증인이 있는가." 나는 백현조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등이 굽지 않은 그 자세로 그저 조정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답답했다. 내 안에서 조바심이 일었다. "증인은 은인뿐입니다." 조정헌이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아니라 조소에 가까운 숨소리였다. "신원이 불명확한 자의 증언은 채택할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분노가 아니었다. 무력감이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조정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관복 자락이 단상 아래로 흘러내리며 소리 없이 펄럭였다. "이현서. 너는 999계단을 완주했으나, 계단 위에서 시험의 취지를 저해한 행동을 했다. 그로 인해 원주 알현 자격을 유보한다." 숨이 턱 막혔다. 5일. 남은 시간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유보라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그 마지막 숨소리가 겹쳐졌다. "삼전주님."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건 네 사정이다." 조정헌이 냉정하게 답했다. "단약원의 규율은 개인의 사정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 말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어조였다. 홍채원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더 짙어졌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듯 바라보았다. 시선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훑고 지나갔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운이 나빴구나." 그녀가 낮게 내뱉었다. "다음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곳 산자락은... 밤에 유독 사고가 많거든." 그 말이 위협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밤에 유독 사고가 많다는 그 말속에, 어제 죽은 이성무사의 얼굴이 겹쳐졌다. 또 다른 누군가의 얼굴로 바뀌기 전에, 나는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백현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억해두겠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소름을 돋게 했다. 목소리에는 어떤 격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듯 건조했다. 그 건조함이 도리어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홍채원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이내 표정을 고쳐 잡았지만, 그 미세한 균열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찰나였지만, 분명했다. 그녀의 여유로움 아래에 숨겨진 무언가가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조정헌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돌렸다. "물러가라." 그 한마디로 심문은 끝났다. 더 이상의 항변도, 변론도 허락되지 않았다. 본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희미했다.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본전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 안에서 홍채원과 조정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남은 시간을 세어보았다. 닷새 중 이미 하루를 흘려보냈다. 세정단을 청할 자격조차 잃은 지금, 무엇이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옆에서 걷는 백현조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눈빛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체념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홍채원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밤에 유독 사고가 많다는 말. 그것이 단순한 위협인지, 아니면 이미 정해진 다음 수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에 머무는 한, 나는 언제든 다시 절벽 아래로 내던져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절벽 아래에는, 이번에는 나를 붙잡아줄 손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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