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어야 사는 황자

5화

객당으로 돌아오는 길. 백현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돌바닥에 닿는 그의 발소리는 여전히 일정했다.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걸음의 속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등이 굽지 않은 그 뒷모습이, 오늘만큼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었다. 소맷자락이 살짝 흔들렸을 뿐,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 걸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유보. 그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격을 유보당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등불 아래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원주는 유보 판결에도 재량을 쓸 수 있는 자다. 다만 그가 나설 명분이 필요하다." "명분." 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채원의 죄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 나는 침묵했다. 죄를 드러낸다는 게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조정헌은 이미 그녀 편에 서 있었다. 증인도 없었고, 증거도 없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조용히 지워져 왔다. 독초, 함정, 그리고 지금의 유보 판결까지. 전부 정황일 뿐,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명분이 없으면."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상태로 계속 유보될 수도 있는 겁니까." "그렇다."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 짧은 한 글자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탁자 모서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차가운 나무의 질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낮게 말했다. 백현조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분노인지, 초조함인지, 혹은 그 무엇도 아닌 냉정함인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그 짧은 대답이 오히려 안심을 주었다. 적어도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바깥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마저도, 오늘 밤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날 밤. 그 시각, 단약원 서편 별원. 집행장로의 처소는 유독 화려했다. 붉은 비단 장막이 늘어져 있었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연기 사이로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향이라는 것을,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홍채원은 탁자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로님."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장막이 걷히고, 사내 둘이 들어섰다. 둘 다 단약원 복장이 아니었다. 검은 무복이었고, 허리에는 각각 칼이 걸려 있었다. 얼굴에는 냉소가 걸려 있었다. 발걸음에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훈련된 자들의 특징이었다. "실패한 놈의 뒤를 잇게 되었으니, 이번엔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홍채원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유독 또렷했다. "실수했던 놈 얘기는 꺼내지 마라."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번엔 두 명이다. 아이 하나 죽이는 데 둘이나 필요할 줄은 몰랐지만." 사내 하나가 낮게 웃었다. 비웃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 아이 곁에 붙어 있는 노인이 문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홍채원이 눈매를 좁혔다. 잔에 담긴 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원이 없다.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자다. 그런 자가 999계단 아래에서 추락하는 사람을 맨손으로 붙잡을 수 있다는 게, 정상적인가."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스쳤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곧 답이었다. "그러니." 홍채원이 말을 이었다. 손끝으로 술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이번엔 노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야 한다. 방화가 가장 확실하다. 아이는 병약해서 불길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고, 죽었다는 사실만 남으면 원인은 중요치 않아." "객당 전체를 태운다는 겁니까."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녀의 말투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사람 목숨을 논하는 자리라기보다, 재고를 정리하는 자리처럼 건조했다.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홍채원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오늘 밤, 늦게 움직여라. 노인이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확신이 아니다." 그녀가 낮게 내뱉었다. 잔 속의 술이 등불 아래 붉게 일렁였다. "내가 만들 것이다." 사내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장막이 다시 내려왔다. 연기만이 방 안에 남아 소리 없이 흘렀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뚫고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밤새 뒤척인 탓에 눈이 뻑뻑했다. 백현조는 새벽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어, 나는 오히려 조금 안심했다. 단약원 관리부에서 백현조를 호출하는 전서가 도착했다. 문지기가 전해 온 종이 한 장. 표면상의 이유는 이현서의 신원 재확인 절차였다. 백현조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전서를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런 절차는 보통 진술이 끝난 직후 이루어진다. 지금처럼 하루가 지난 뒤에 갑자기 호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유보 판결이 내려진 직후, 관리부에서 이런 종류의 절차를 진행한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은 바가 없었다. 너무 매끄럽게, 너무 때맞춰 도착한 전서였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형형한 눈빛이 나를 훑었다. 그 시선 속에 무언가를 가늠하는 기색이 스쳤다. "저녁까지 돌아오겠다. 방을 나서지 마라." "예."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 스스로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유 없는 불안을 느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없는 그 걸음이, 오늘만큼은 어딘가 서두르는 듯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아, 어젯밤 홍채원의 처소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만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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