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 여자의 이름은 서은비였다.
왕궁에서 시녀로 일하던 시절, 나는 그녀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중전마마를 모시던 나와, 다른 처소의 말단 시녀였던 그녀는 접점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세답방 앞에서 몇 번 스쳤고, 한번은 젖은 빨래 더미를 나눠 든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손이 트도록 일하면서도 웃는 낯을 잃지 않던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눈치 빠르고, 윗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시녀.
그때는 그저 그런 인상으로 남았을 뿐인데, 지금은 내 남편의 아이를 안고 이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부인."
박덕수 집사가 창가로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이 저택의 집사로 10년을 나와 함께 일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쯤 낮았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각하께서 정식으로 맞으라 하셨는데..."
"모셔."
나는 짧게 대답했다.
"네?"
"모시라고."
"부인, 그게 그러니까, 정식으로 맞으신다는 건... 저, 그러면 이 저택의 안주인 자리가..."
"각하의 지시대로 하라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부인,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박덕수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 순간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저택 전체에 소문으로 퍼질 것이 뻔했다. 하인들의 입은 벽보다 빠르다.
응접실에서 벌어진 광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노골적이었다.
이현성 남작은 사용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요리사 최인호는 앞치마를 벗지도 못한 채 손을 어색하게 모으고 서 있었고, 정원사 한도석은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문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안살림을 총괄하는 매실댁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그 눈빛만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앞으로 이 집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오."
남작의 말에 사용인들 사이로 낮은 술렁임이 퍼졌다. 최인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도석은 마른침을 삼키는 게 목울대의 움직임으로 다 보였다. 매실댁만이 유일하게 나를, 정확히는 내 반응을 살피듯 곁눈질했다.
서은비는 아이를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겸손해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눈이 응접실 구석구석을 훑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그림, 창가의 장식장, 바닥의 카펫 무늬까지.
'재고를 확인하는 눈이 아니야. 이 집의 값어치를 재고 있어.'
나는 문 옆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남작도, 서은비도, 심지어 사용인들조차 내 쪽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마다 나만 비껴가는 기묘한 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나에게 냉정함을 되찾아주었다.
이현성 남작과 나는 10년 전 정략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세어스가와 이현성가는 오랜 거래 관계였고, 두 집안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가 나였다. 처음부터 애정을 기대한 결혼은 아니었다. 그래도 10년간 나는 이 저택의 안살림을 완벽하게 꾸려왔다. 그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저 여자가 이 집을 얼마나 알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 저택에는 겨울마다 얼어붙는 뒷마당 우물이 있고, 3층 서고의 창문 하나는 비만 오면 물이 샜다. 매실댁은 봄이 되면 허리가 아파 며칠 쉬어야 했고, 최인호는 생선 손질에는 능하지만 육류 손질에는 서툴렀다. 한도석이 가꾸는 장미밭은 매년 초여름 진딧물이 끓어 특별히 손을 봐줘야 했다. 그 모든 것을 나는 알았고, 저 여자는 몰랐다.
서은비가 저택을 둘러보는 사이, 나는 조용히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10년치 회계 장부가 정리되어 있었다.
장부를 꺼내 펼쳤다. 종이마다 내 필체로 빼곡히 적힌 숫자들이었다. 겨울 땔감 구입 내역, 계절마다 바뀌는 사용인 급여, 창고 재고 관리, 저택 보수 공사 이력까지. 지난달 지붕 수리에 들어간 비용, 매년 가을 저장해두는 곡식의 양, 겨울을 대비한 장작의 적정 재고량. 심지어 마구간 말 두 마리의 사료 배합 비율까지 한 줄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걸 다 넘겨야 하나.'
순간 손이 멈췄다. 이 장부를 넘긴다는 것은, 이 저택의 실질적인 운영 방식 전체를 넘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 사람은 이 저택의 우물이 어디서 어는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렇다면 이 집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겨울이 오면 저 여자는 땔감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를 것이고, 봄이 오면 매실댁의 허리를 챙길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 이 집을 나갈 사람이었고, 이 집의 미래는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지만, 손끝은 여전히 장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로 서은비가 아이를 달래는 소리도 함께.
나는 장부를 덮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 서재 문이 조용히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