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부서진 맹세의 정원

2화

어릴 적 나는 완벽한 신붓감이 되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여섯 살, 청운 후작가의 응접실에서 처음 강태준을 만났다. 그날 나는 어머니가 새로 맞춰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스가 목까지 올라와서 간지러웠던 것까지 기억난다. 그때 그는 여섯 살이었고, 나를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정원으로 뛰어나가버렸다. 응접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나는 눈만 껌뻑였다. 어머니는 그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저 도련님, 참 개구쟁이시네요." 그 말이 왜 그렇게 좋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다른 아이였다면 무례하다고 했을 텐데, 어머니의 웃음소리 하나에 나는 그 무례함마저 매력으로 둔갑시켰다. 나는 그날부터 저 개구쟁이의 신부가 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여섯 살짜리가 세운 목표치고는 꽤나 확고했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서연아, 약혼자를 잘 섬겨야 한다. 그게 네가 살아남는 방법이야." 살아남는 방법. 그 말을 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할 리 없었지만,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대체로 옳았으니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머니 본인도 그 방법대로 살아남았던 사람이었다. 후작 부인이라는 자리,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삼켰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언어 교사를 세 명이나 붙여 대륙 공용어와 남부 방언까지 배웠다. 강태준이 남부 상단과의 무역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는 공용어 문법을, 오후에는 남부 방언의 억양을 교정받았다. 혀가 꼬여서 같은 문장을 서른 번씩 반복한 날도 있었다. 검술은 배우지 않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시집은 전부 외웠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시구를 중얼거리다 잠든 밤이 며칠이었는지 셀 수도 없다. 그의 취향에 맞춰 자수를 놓았고, 그가 즐긴다는 승마도 배웠다. 낙마해서 어깨를 다친 적도 있었는데, 그날조차 나는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부어오른 어깨를 소매로 가리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웃긴 건, 그는 내가 뭘 배우는지 관심도 없었다는 거다. 남부 방언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도 그는 그냥 "그래" 한마디로 넘겼다. 열두 해 동안 쌓아 올린 노력의 무게가 그 한마디 앞에서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그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만드는 데 몰두했던 것 같다. 완벽한 약혼녀라는 조각상을 스스로 깎아 만들고, 그 조각상 안에 갇혀 있었던 거다. 조각을 깎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매끈해지는 표면만 들여다보며 만족했다. 청운 후작가는 그리 대단한 가문이 아니었다. 중견 귀족 정도. 반면 강태준의 적화 공작가는 왕실과도 가까운 명문가였다. 나는 늘 이 결혼이 우리 가문에 얼마나 중요한지 들으며 자랐다. 식사 자리에서도, 다과회에서도, 심지어 명절 인사를 드릴 때조차 그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종 서재에서 나를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이 혼사가 성사되면 청운가는 앞으로 백 년은 걱정 없다. 알겠니?"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하나만 잘하면, 이 가문의 백 년이 든든해진다는데 어떻게 딴생각을 할 수 있을까. 열 살 무렵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백 년. 백 년이라는 단어가 열 살짜리 아이의 어깨 위에 얹히면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 아버지는 알았을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사실 그 결혼 자체를 원했다기보다, 그저 조용히 살아남고 싶었던 것 같다. 큰오빠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사촌들과 신경전을 벌였고, 그 신경전은 가끔 저녁 식탁까지 이어져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곤 했다. 둘째 언니는 다른 공작가로 시집가서 시가 눈치를 보며 살고 있었다. 명절마다 다녀가는 언니의 얼굴이 조금씩 야위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나만큼은 그런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안정적인 자리에 앉아 조용히 늙어가고 싶었다. 그게 내 진짜 목표였다. 대단한 사랑이 아니라, 평온한 생존. 강태준과의 혼약은 그 평온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 다리를 지키기 위해 뭐든 했다. 그가 좋아하는 걸 배우고, 그가 싫어하는 걸 피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는 데 온 신경을 썼다. 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나는 그날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밤새 되짚어보곤 했다. 그런데 그 다리가 어제 정원에서 통째로 무너졌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두 해 동안 배운 자수, 열두 해 동안 익힌 언어, 열두 해 동안 다듬은 예법. 손끝에 박인 굳은살, 자수 바늘에 찔린 흉터 자국까지도 지금 이 순간 아무 쓸모도 없었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었고, 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나는 촛불을 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이앤이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긴장이 묻어 있었다. 다이앤도 이미 뭔가 알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벽난로 장작이 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미간부터 좁혔다. "강 공자 쪽에서 사람을 보냈다." "뭐라고 하던가요." "윤아라 영애를 학대했다는 소문이 벌써 사교계에 돌고 있어." 소문. 하룻밤 새에 벌써 소문이라니. 어제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강태준, 그리고 윤아라뿐이었을 텐데.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누가, 어디까지 퍼뜨렸단 말인가. "제가 그런 적 없다는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안다. 아는데……" 아버지가 말끝을 흐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깊어진 주름이 보였다. "증거가 없어. 증거 없이는 사교계에서 이 소문을 막을 방법이 없다." 증거가 없다는 건, 저쪽도 증거가 없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왜 소문은 나만 죄인으로 만드는 걸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늘 확신에 차 있던 그 얼굴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보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 세상이 진실보다 소문을 더 믿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열두 해 동안 쌓아온 것들이 하룻밤의 속삭임 앞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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