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부서진 맹세의 정원

3화

일주일 만에 다시 마주한 강태준은 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적화 공작가의 겨울 연회. 초대장을 받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연회에 가느냐 마느냐로 또 얼마나 말이 나올지. 가지 않으면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가면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을 거고. 어느 쪽이든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나는 마차에 올랐다. 후작가의 체면이란 게 참 무겁기도 하지. 참 아이러니했다. 나를 죄인으로 몰아넣은 가문의 연회에, 죄인으로 몰린 내가 웃으며 인사를 다녀야 한다니.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를 때, 시녀가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화려한 걸로 입으실까요, 수수한 걸로 입으실까요." "화려한 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숨어봤자 소용없는데, 기죽어 보이기까지 하면 더 우스워지잖아." 시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지만, 나는 그냥 웃었다. 어쩌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라도 굴어야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다들 알고 있는 거다. 소문의 주인공이 왔다는 걸. "이서연 영애 아니십니까."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에 묘한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요즘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위로인 척 구경하고 싶은 거겠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나 보다. 연회장 저편에서 강태준이 윤아라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렸고, 여전히 눈물을 머금은 듯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나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살짝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연기 하나는 참 훌륭하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태연히 눈을 돌렸다. 저 정도면 무대에 세워도 되겠어. 강태준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이 남자, 굳이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가만히 있어도 시선 받는 사람이 왜 스스로 무대에 서려는 건지 모르겠다. "이서연 영애." 그가 형식적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존칭까지 붙여가며. "강태준 공자님." 나도 똑같이 형식적으로 답했다. "불편하실 텐데, 굳이 오셨군요." "초대장을 받았으니까요."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공작가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예의. 그 단어를 듣자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예의를 논하기엔 그쪽이 더 먼저 어긴 것 같은데. 파혼 통보를 편지 한 장으로 끝낸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소문은 들으셨을 테고." "들었습니다." "해명하실 건가요." "해명이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가 하지 않은 일을 굳이 해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가 잠깐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나 보다. 나도 이렇게 침착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당당하시네요." "당당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이유가 있다면, 어째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들으려는 분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잔을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아니, 정확히는 듣고 싶어 하지 않으셨죠." 그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시선을 피했을 텐데, 오늘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뭐, 이제 와서 피할 이유도 없잖아. "태준님." 윤아라가 다가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이서연 영애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말 잘 짜인 연기였다. 저 손끝의 떨림까지 계산된 건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야." 강태준이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볼 때완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멀어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술잔을 들었다. 와인이 썼다. 원래 이렇게 썼나.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쓴 건가. 연회장 한쪽에서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에 대한 얘기라는 걸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기 좀 봐, 파혼당한 영애가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그러게 말이야, 낯짝도 두껍지."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진짜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 나는 모르는 척 잔을 비웠다. 배고프다. 이럴 때 밥이나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때, 낯선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침착하시네요, 이서연 영애." 돌아보니 처음 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짙은 남색 예복에 왕실 문양 배지를 달고 있었다. 왕실 관계자였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저 상황에서 저렇게 흔들림 없이 대답하는 건 아무나 못 합니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호의인지 호기심인지 구분이 안 가는 미소였다. 뭐지, 이 사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말을 거는 거지. "실례지만, 어디서 뵌 적이 있던가요." "글쎄요. 어디서였을까요."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이 사람도 강태준 못지않게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나 보다. "실례지만 성함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대답이 되지도 않는 대답을 남기고,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뭐지, 저 사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뭔가 찜찜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왕실 배지를 단 사람이 굳이 나한테 말을 걸 이유가 뭘까. 연회는 계속되었고,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오늘 밤, 나에 관한 소문은 또 하나 늘어날 게 분명했다. "강태준 공자와 아직도 얘기가 잘 통하는 모양이네요." 누군가 지나가며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술잔을 비웠다. 오늘만 몇 잔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공작 부인이 손님들에게 인사를 돌았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이서연 영애,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형식적인 말투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똑같이 형식적으로 답했다. 서로 속은 다 아는데,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는 이 우스운 놀음. 이 집안 사람들은 다들 이런 연기에 도가 텄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소문의 끝이 어디일지, 그리고 그 왕실 배지를 단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나 원래도 차멀미 심하단 말이야…… 오늘따라 유독 속이 울렁거리는 게, 와인 탓인지 아까 그 남자 탓인지 모르겠다. 둘 다 답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도 참 길었다. 그런데 눈을 감아도 자꾸 그 남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니. 그 말이 좋은 예고인지, 나쁜 예고인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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