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부서진 맹세의 정원

4화

연회가 끝나고 사흘 뒤, 사교계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윤아라가 내 손에 밀려 계단에서 굴렀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날 나는 아예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후작가 저택에서 하루 종일 자수를 놓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계단에서 그녀를 밀었단 말인가. 손끝에 바늘이나 찔렀지, 사람은 안 찔렀다. "아가씨, 이거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다이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벌써 다들 사실처럼 얘기하고 다녀요. 시장에서도, 사교 모임에서도. 어젯밤엔 옆집 하녀까지 와서 물어보더라고요, 진짜냐고." "진짜면 내가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자수나 놓고 있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떨렸다. 바늘이 자꾸 엉뚱한 곳을 찔렀다.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아니어도 사람들 입에 열 번 오르내리면 그게 곧 사실이 되어버린다. "내가 그 시간에 저택에 있었던 건 증명할 수 있어?" "그날 오후 내내 저와 응접실에 같이 있었잖아요. 하녀들도 여럿 봤고요. 마리, 소피, 그리고 부엌 담당 한나까지도요." 다행이었다. 이번엔 진짜 증거가 있었다. 지난번처럼 억울하게 당하고 끝날 게 아니라, 이번엔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그래봤자 소용없을지도 몰라. 저쪽은 이미 여론을 다 장악했어. 공작가에서 손을 쓴 거라면, 우리가 진실을 들이대도 아무도 안 들을걸."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잖아요." 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걱정과 답답함이 뒤섞여 있었다. 후작가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딸이 더 큰 위험에 휘말릴까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눈빛을 못 본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이앤과 응접실에 있던 하녀 세 명의 증언을 서면으로 정리했다. 그날의 날씨, 대화 내용, 방문한 사람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완벽하게. 심지어 그날 다이앤이 몇 번 하품을 했는지도 적었다. 웃긴 얘기지만, 이런 자잘한 디테일이 오히려 신빙성을 만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 딱 맞아떨어지면 오히려 의심받는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완벽할 리가 없으니까. 서면을 다 정리하고 나니 밤이 깊었다. 손목이 뻐근했다.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기분에 배가 고파졌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니, 나도 참 속 편한 사람이다. 다음 날, 나는 이 서면을 들고 적화 공작가로 향했다. 아버지는 말리셨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서연아, 저쪽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혼자 가는 건 위험해." "제가 가만히 있으면 저쪽은 더 신나서 소문을 퍼뜨릴 거예요. 지금 가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해요." 마차 안에서 나는 서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혹시 빠진 게 있을까 봐. 혹시 저쪽에서 트집 잡을 구석이 있을까 봐.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강태준의 얼굴, 윤아라의 표정,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로 가득했다. 공작가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물러서면 그날로 나는 진짜 계단에서 사람을 민 여자가 되어버린다. 공작가 응접실에서 만난 강태준은 나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왜 오셨죠." "윤아라 영애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그날, 저는 저택에 있었습니다. 여기 증언과 기록이 있어요." 나는 서면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종이를 받아 들긴 했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눈길만 슬쩍 훑고는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태도에서 나는 벌써 답을 봤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여기 왔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거였다. "이런 종이 몇 장으로 뭘 증명하겠다는 겁니까." "사실을 증명하는 거죠. 저는 그날 그 자리에 없었어요." "영애의 하녀와 하녀들의 증언이라니. 자기 사람들끼리 입 맞추면 그게 증거가 됩니까?" "그러면 아라 영애의 증언은 누가 뒷받침해주죠? 아라 영애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요?" 그가 멈칫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없구나. 목격자가 없는 거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윤아라가 들어왔다. 팔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붕대였다. "태준님……."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몸을 살짝 휘청였다. "저 아직도 어지러워요." "아라야, 괜찮아?" 강태준이 그녀를 부축하며 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보십시오. 아라는 아직도 이렇게 아파하는데, 영애는 지금 뭘 증명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나는 그 붕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계단에서 굴렀다면서 팔에 붕대를 감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흘이나 지났는데. 사흘 동안 붕대 없이도 잘만 돌아다녔다는 얘기를 나는 이미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들었다. 시장에서, 다과회에서, 심지어 어제는 정원에서 산책하는 것도 봤다고 했다. "윤아라 영애, 다치신 곳이 정확히 어디죠?" "네?" "계단에서 구르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붕대는 오늘 처음 보이는 거죠?" 윤아라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시선이 흔들리는 방향,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각도, 그 모든 게 나에게는 익숙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신호였다. 나도 한때 많이 써봤으니까. "그건…… 상처가 늦게 부어올라서……." "멍이 늦게 든다는 건 이해하지만, 상처가 늦게 나타난다는 건 이상하네요. 게다가 어제 정원에서 붕대 없이 산책하셨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이서연 영애!" 강태준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아라를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 아니라 사실 확인을 하는 거예요. 태준님도 함께 확인하고 싶으실 텐데요. 만약 정말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저도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태준님은 확인해보셨나요?" 그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옆에서 윤아라가 슬며시 붕대 감은 팔을 뒤로 감췄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확신했다. 저 여자, 진짜로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응접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강태준은 여전히 윤아라를 부축한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윤아라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거라고. 아주 작은 균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커질 균열이라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서면을 다시 챙겨 들었다. 탁자 위에 던져져 있던 종이를 하나하나 다시 정리하는 손길이 태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기록은 후작가에도 보관되어 있으니, 언제든 확인하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응접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윤아라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강태준이 그녀를 달래는 목소리도 함께. 그 다정한 목소리가 조금 전까지 나에게 쏘아붙이던 그 차가운 음성과 같은 사람 것이라니, 참 신기했다. 마차에 올라탄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내가 던진 질문 하나가, 아마도 저쪽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을 거라고. 그리고 그 대가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다이앤이 마차 안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강태준 공자님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괜찮아. 오히려 잘 됐어. 이제 저쪽도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붕대. 그 붕대는 대체 무엇을 감추기 위한 거였을까. 그리고 강태준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마차가 후작가 대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나는 그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오늘의 방문이 나에게 유리한 카드가 될지, 아니면 더 큰 화를 불러올 도화선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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