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5세, 정령이 침묵했다

1화

청연 공작가의 대강당은 성인식을 위해 사흘 밤낮을 준비했다고 들었다. 흰 대리석 기둥마다 은실로 짠 휘장이 걸렸고, 바닥에는 계약의 문양이 금분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문양 한가운데, 나는 열다섯 해 동안 배운 예법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계약식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거창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준비는 과했다. 천장에는 마력을 머금은 유리 장식이 매달려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고, 벽을 따라 도열한 시녀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청연 공작가의 장녀, 그것도 왕자와 혼약을 맺은 몸이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게 아버지의 논리였다. 마법사가 낭독하는 계약문이 끝나면 정령이 응답한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나는 그 규칙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별일은 없을 거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사실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예법 수업을 다섯 살 때부터 받았고, 마력 측정에서도 평균 이상의 수치를 기록했다. 문양을 그리는 마법사도 왕실에서 파견된 최고위 술사였다. 실패할 조건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청연 공작은 단 위에서 흡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손수건을 쥔 채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혼약자인 선우진 왕자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애써 정면만 바라보았다. '저쪽을 보면 분명 웃어줘야 할 텐데, 지금 표정 관리가 잘 될지 모르겠네.' 그런 한가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나는 이 순간을 그저 예정된 절차로 여기고 있었다. 마법사가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정령이시여, 이서윤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문양이 빛났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순서였다. 그 다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잦아들고, 강당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늦어지는 걸까.' 그런 가정을 세워봤지만,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가는 걸 보고 그 가정을 접었다. 그는 손끝을 가늘게 떨며 다시 계약문을 낭독했다. 목소리가 처음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두 번, 세 번. 문양은 매번 빛났고, 매번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세 번째 실패 뒤에는, 마법사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는 게 보였다. 그 정도로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격식 있는 자리에서 체통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신호가 된 것처럼, 강당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정령이 나타나지 않았어." "청연 공작가의 장녀인데." "전례가 없는 일이잖아." "마력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설마, 저 정도 가문에서 그럴 리가." 각자 나름의 추측을 내놓고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신은 아니었다. 다들 뭔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보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말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등에 꽂히는 걸 느꼈다. 얼굴에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침착하자. 이유가 뭐든 지금 무너지는 건 최악이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삼십 분 가까이 버티고 있었더니 다리도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소한 감각까지 신경 쓰일 만큼, 나는 애써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흡족함에서 당혹으로, 당혹에서 다시 무언가 억누르는 얼굴로. 그 억누르는 얼굴이 가장 무서웠다. 나는 아버지가 화가 나면 오히려 조용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괜찮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순간에도 나는 논리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정령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할 수 있었다. 계약자의 마력이 부족하거나, 문양에 결함이 있거나, 혹은 정령 쪽에 사정이 있거나. 어느 쪽이든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밝힐 수 있는 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뿐이겠지.'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차피 무릎을 꿇은 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때였다. 강당 뒤편에서 새로운 빛이 터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강예린이었다. 백작가의 장녀, 나와 같은 학년, 같은 나이. 그녀는 자신의 계약식을 나보다 뒤에 배치받았을 텐데, 지금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저건, 순서를 무시한 거잖아.' 당장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틈조차 없었다. "제가 먼저 해도 되겠습니까." 누구에게 묻는 것도 아닌 말투였다. 마법사도, 아버지도 대답할 틈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미리 준비해놓은 사람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빛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그 빛은 조금 전 내 문양에서 났던 빛보다 몇 배는 밝았다. 빛 속에서 푸른 물빛의 형상이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 날개 달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정령이었다. 날개 끝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데, 바닥에 닿기도 전에 빛으로 흩어졌다. "아쿠아페어리와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마법사의 외침이 강당을 울렸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B등급 정령이었다. 열다섯 살 계약식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등급이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무릎이 저려오는 감각조차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어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나를 향했던 웅성거림이, 이제는 강예린을 향한 감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전환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는 잠시 내가 아직 이 강당 안에 있는 존재인지조차 의심했다. '축하할 일이긴 한데, 타이밍이 참…….'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감상을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그 정도였다. 강예린이 나를 돌아보았다. 짧게, 딱 한 번.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승리를 확신한 사람의 것이라는 걸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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