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설린 왕립 마법학원의 개학식은 늘 그렇듯 지루했다. 학장의 훈화는 삼십 분을 넘겼고, 나는 그동안 옆자리에 앉은 한소율의 옷깃을 몰래 붙잡고 있었다. 놓으면 도망갈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소율은 작년에도 개학식 중간에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두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전적이 있었다. 그때 학장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서윤아, 나 진짜 이런 데 안 어울려."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억지로 앉아있는 거야."
"너는 잘 앉아있잖아."
"나야 워낙 인내심이 좋아서 그런 거고."
소율은 작은 몸을 최대한 접듯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하고, 시선이 조금이라도 몰리면 숨을 곳부터 찾는 애. 나는 그런 소율을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사람이라서, 오늘도 그저 별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학장의 훈화가 끝나갈 즈음엔 나도 슬슬 지쳐서 소율의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소율이 팔꿈치로 슬쩍 밀어냈지만 그다지 진심은 아니었다.
별일은 있었다.
마력 실습 시간, 상급생 하나가 갑자기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했다. 처음엔 그냥 손끝에서 스파크가 조금 튀는 정도였는데, 순식간에 몸 전체를 휘감듯 커졌다. 실습실 전체가 새하얀 스파크로 뒤덮였고, 교수가 소리쳤고, 학생들이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누군가는 책상을 넘어뜨렸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나도 소율의 팔을 잡고 뛰려던 참이었는데, 소율이 내 손을 뿌리쳤다.
"소율아!"
소율은 폭주하는 상급생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갔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그냥 걸어갔다. 위험하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몸이 안 움직이는 건 처음 겪어봤다. 게임에서 캐릭터 조작이 딜레이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웃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빛이 하얗게, 정말 새하얗게 폭주하는 마력을 감쌌다. 검은 스파크가 하양으로 뒤덮이면서 잠잠해지는 걸 나는 두 눈으로 봤다. 오염이 정화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마치 더러운 물이 순식간에 맑아지는 것처럼, 검은 기운이 걷히고 새하얀 빛만 남았다. 실습실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스파크 소리도, 발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해진 뒤에 남은 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급생과, 그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율이었다. 소율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인도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저게 성녀의 힘이야."
누군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 한마디가 실습실 안을 삽시간에 채웠다. 성녀. 성녀. 성녀. 단어가 파도처럼 번졌다. 학생들이 하나둘 소율 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 존재조차 모르던 애를, 이제는 다들 알고 싶어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소율의 눈에서 두려움을 봤다. 남들은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소율은 그냥 도망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고, 시선은 갈 곳을 못 찾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소율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등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계속 따라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봐 손에 힘을 더 줬다.
그렇게 정신없이 복도를 빠져나오다가, 나는 뜻하지 않게 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학원 뒤뜰, 인적이 드문 정원 구석에서 왕태자 윤재헌이 서 있었다. 은발과 청안. 학원 전체가 떠받드는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봐도 학생들이 웅성거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냉정하다는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권시아였다.
백금색 머리에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 붉은 눈동자. 학원에서는 '악역 영애'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 권시아.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시녀를 몇이나 갈아치웠다는 소문, 하급생을 괴롭혀서 자퇴시켰다는 소문, 성격이 얼음장 같아서 아무도 다가가지 못한다는 소문. 나도 그 소문을 그냥 그대로 믿고 있었다.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내 눈앞의 권시아는 그런 소문과는 정반대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재헌의 소매를 꼭 붙잡고 있었다. 겁먹은 얼굴로. 방금 소율이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숨을 곳을 찾는 눈빛이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헌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낮음 안에 명백한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차갑기로 유명한 사람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학원 초상화에 걸릴 법한 무표정의 대명사가, 지금은 눈썹까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봅니다."
"보라고 하십시오."
"전하의 평판에……."
"평판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짧은 말들이 오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지켜보고 있었다. 권시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재헌은 그 손을 감싸듯 자신의 소매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와.
이건 뭐지.
악역 영애와 냉정한 왕태자, 라는 이야기치고는 뭔가 그림이 이상했다. 소문 속의 관계와 눈앞의 관계가 완전히 다른 문법으로 쓰여 있었다. 마치 누가 대본을 잘못 나눠준 것처럼. 나는 순간 이 학원에 떠도는 소문들을 다 재검토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서윤아, 뭐 봐?"
소율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돌아봤을 때는 두 사람 다 정원에서 사라져 있었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방금 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소율의 성녀 각성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벌어진 날, 나는 정작 그것보다 그 짧은 뒤뜰 장면이 더 오래 남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상한 예감이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날.
그날 저녁, 학원 게시판에는 벌써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한소율 양, 마력 폭주 정화 확인. 성녀 후보 등재.' 게시판 앞에는 벌써 학생들이 몰려서 그 종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 무리를 지나치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소율이 걱정됐다.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소율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소율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소율아."
"…나 무서워."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온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이불 위로 그 작은 몸을 안았다.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나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게 무슨 소용이야. 다들 이제 나만 쳐다볼 거잖아."
이게 앞으로 어떤 일의 시작인지, 그때는 정확히 몰랐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 소율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학생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날 뒤뜰에서 본 장면 역시, 단순히 우연히 지나친 풍경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이불을 뒤집어쓴 소율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내린 학원 건물들 사이로, 아직도 성녀라는 단어를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