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학원 게시판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성녀 후보 한소율, 특정 파벌과 이미 접촉 중.'
완전히 지어낸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웃음이 나올 정도로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소율은 그 게시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굴이 하얘졌다. 원래도 하얀 애가 더 하얘지니까 무슨 백지장 같았다.
"이거 완전 가짜잖아. 나 아무 파벌도 안 만났는데."
"내가 알지, 알아."
"근데 왜 다들 진짜인 것처럼 봐?"
"그게 문제야. 아무도 진실 안 궁금해해."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게시판 앞을 지나가던 애들이 힐끔거리며 소율을 쳐다보고, 저들끼리 소곤거리다가 다시 흩어졌다. 마치 소율이 무슨 전염병 걸린 사람처럼. 현실이었으면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에 해명 글 하나 올리고 끝날 일인데, 여긴 그런 게 없었다. 반박할 창구 자체가 없다는 게 제일 무서웠다.
소문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됐다.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하루 만에 학원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이 속도감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권시아를 향한 소문이 퍼졌던 방식과 똑같았다. 출처 불명, 근거 없음, 그러나 압도적인 전파력. 마치 누군가 미리 대본을 써놓고 배포하는 것 같았다.
"소율아, 일단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지내. 반박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커져."
"…그건 알겠는데, 서윤아. 나 진짜 무서워."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무섭다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소율이 애써 눌러왔던 감정 전부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나는 도현 오빠를 찾아 학생회관으로 갔다. 오빠는 이미 심각한 얼굴로 서류 뭉치를 뒤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마시다 만 커피가 다 식어서 표면에 얇은 막이 생겨 있었다. 저 커피, 몇 시간째 저러고 있는 거 같은데.
"오빠, 소율이한테 이상한 소문이 붙었어."
"알아, 나도 봤어. 이거 완전 지난번 방식 그대로야."
"권시아 영애 소문 낼 때 방식?"
"어. 동일한 손이 움직이고 있어."
나는 창고 뒤에서 들었던 대화를 오빠에게 그대로 말해줬다. 오빠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졌다.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위에서 시켰다는 게,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내야 해."
"어떻게?"
"그 학생들 얼굴 기억나?"
"아니, 목소리만 들었어. 얼굴 볼 새도 없었어."
"목소리 특징은?"
"그냥… 남자애 둘? 하나는 좀 낮고, 하나는 빠르게 말하는 느낌이었어."
"그거로는 못 찾아. 학원에 남자애가 몇 명인데."
오빠는 서류를 정리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 학기 파벌 움직임 중에 딱 하나 이상하게 큰 손이 있어. 권 공작가랑 대립하는 쪽. 걔네가 시아 영애 이미지 깎으면서 얻는 게 뭘까, 계속 생각했는데—"
오빠는 말을 멈췄다. 서류 한 장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성녀 후보까지 등장하면 판이 완전히 커지는 거야. 시아 영애 이미지가 나빠지면 왕태자 약혼이 흔들려. 그 틈에 새로운 성녀 후보를 자기 세력에 붙이면, 왕실과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어."
순간 등이 서늘해졌다. 게임에서 치트키 쓰는 상대를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 룰도 다 못 외웠는데, 저쪽은 이미 판을 셋, 넷 앞서 짜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율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거야?"
"이용당할 위험이 크다는 거지.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지?"
"응. 여긴 소문 하나로도 사람 인생 접게 만드는 곳이야. 근데 증거 없는 반박은 또 다른 소문이 될 뿐이고."
나는 그 말에 온몸이 무거워졌다. 소율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에는 단순했는데, 이제는 학원 전체 파벌들의 계산 속에 소율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체스판 위에 말 하나가 새로 놓인 거고, 그 말이 하필 내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오빠, 나 어떻게 해야 돼?"
"일단 소율이 곁에 붙어 있어. 저쪽이 다음 수를 두기 전에 우리도 뭔가 알아내야 해."
그 대답이 든든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허망했다.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건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날 저녁,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학원 뒤뜰을 산책하다가 다시 재헌과 권시아를 마주쳤다. 이번엔 두 사람 다 나를 발견하고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자세가 나를 향해 살짝 열려 있었다.
"이서윤 양."
재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나를 정식으로 부르는 순간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냉랭함 위로 뭔가 다급함이 얹혀 있었다.
"네, 전하."
"권시아에게 들었습니다. 서윤 양이 진실을 보려 한다고."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권시아는 재헌의 옆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이상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경계하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뭔가 다른 결이 흐르고 있었다.
"저는 그냥, 제 친구를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재헌이 짧게 대답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사이로 밤바람이 지나갔다. 정원의 나무들이 서늘하게 흔들렸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윤 양이 본 것, 들은 것들, 다 사실입니다. 시아와 저는 소문과 다른 관계입니다."
"…그건 저도 어느 정도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만든 세력이, 이제 한소율 양에게도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헌의 청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냉정하다고만 알던 그 눈빛 안에, 지금은 명백한 경계심과 다급함이 뒤섞여 있었다. 사람이 이런 눈으로 남을 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건 이제 시아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녀 후보까지 끌어들인 이상, 이건 학원 전체를 흔드는 판이 됐습니다."
권시아가 재헌의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서윤 양. 소율 양을 지키시려면, 저와도 힘을 합치셔야 할 거예요."
그 말투는 부탁이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사실을 확인하는 것처럼 들렸다. 권시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확신을 갖고 말하면 반박할 틈을 안 주는.
나는 그 말에 뭔가 대답을 해야 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몇 주 전까지는 그저 소꿉친구 하나만 조용히 지키면 되는 삶이었다. 도시락 나눠 먹고, 시험 기간에 같이 밤새우고, 그런 걸로 하루가 끝나던 삶. 그런데 지금은 왕태자와 그의 숨겨진 연인, 그리고 이름 모를 파벌의 음모까지, 감당하기엔 너무 큰 그림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 길, 등 뒤에서 재헌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 이제 물러설 수 없게 됐어."
"알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두 사람의 대화는 그 뒤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몇 마디에 담긴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어둑해진 정원을 혼자 걸어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자갈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치 이 조용한 밤에 나만 큰 소리를 내며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원 위로 뜬 초승달이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달을 보면서도 자꾸 소율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일 학원에 가면 또 무슨 소문이 붙어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속이 답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