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이라 불린 첫사랑

4화

오빠의 경고를 들은 지 사흘 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소율의 방문 앞에 정체불명의 초대장이 매일 쌓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장이었는데, 사흘째 되던 날엔 방문 앞이 아예 우체통처럼 변해 있었다. 봉투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금박을 두른 것, 검은 밀랍으로 봉인된 것, 심지어 향수 냄새가 나는 것까지. 그중 절반은 발신인이 명확한 파벌 소속 귀족들이었다. 이름만 봐도 어느 줄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는, 그런 익숙한 얼굴들. 나머지 절반은 아예 발신인 표기가 없었다. 나는 그 초대장들을 하나씩 확인하다가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종이 한 장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이거 다 거절해야겠지?" "당연하지. 이거 완전 낚시 미끼 세트잖아." 소율이 초대장을 한 장씩 훑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끼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미끼치고는 포장이 지나치게 화려했지만. "나는 그냥 조용히 졸업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내가 있잖아. 방패막이 역할, 이서윤이 맡음." 소율이 픽 웃었다. 그 웃음이라도 나온 게 다행이었다. 나는 초대장 더미를 서랍 깊은 곳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이걸 다 태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봤자 내일 또 쌓일 게 뻔했지만. 그런 와중에 나는 우연히 학원 뒤편 창고 근처에서 두 학생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다. 지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목소리가 낮고 은밀해서 발이 저절로 멈췄다. 신발 밑창이 젖은 흙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신경 쓰였다. "그 소문 있잖아, 권시아 영애가 시녀를 때렸다는 거." "아, 그거 내가 퍼뜨린 거야." "뭐? 진짜야?" "어. 위에서 그렇게 시켰어.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이번 학기 안에 그 이미지 계속 굳혀야 한다고 하더라고." 순간 숨이 멎었다. 나는 창고 벽에 몸을 붙이고 그 뒤 대화를 더 들으려 했지만, 발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이 자리를 떴다.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벽에서 등을 떼고 나서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위에서 시켰다니. 오빠가 말한 '누군가의 의도'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 노골적으로 확인될 줄은 몰랐다. 소문이라는 건 원래 저절로 자라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누가 씨를 뿌리고 물까지 준 셈이었다. 잡초치고는 너무 계획적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도서관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척하다가, 또 권시아와 마주쳤다. 책장 사이로 지나가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괜히 다시 꽂아 넣었다. 이번엔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이서윤 양, 맞으시죠." 뜻밖의 접근이었다. 나는 놀란 걸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네, 권시아 영애님." "제 얘기, 오라버니에게서 들으셨다고요."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도현 오빠와 그녀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고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소문 속의 그녀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놀라지 마세요. 도현 님은 제가 유일하게 믿는 학원 사람 중 하나예요." "…그럼 저는 이제 두 번째인가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서윤 양이 정말로 진실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봤다. 노을이 그녀의 백금색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소문 속의 얼음장 같은 영애와는 전혀 다른, 그냥 지쳐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은 지금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구나. "영애님, 그 소문들…" "다 거짓말이에요. 시녀를 때린 적도 없고, 하급생을 자퇴시킨 적도 없어요." "그럼 왜 반박하지 않으세요?" 권시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반박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는 지우는 게 더 어려운 법이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그냥 오랫동안 견뎌온 사람의 담담함만 있었다. 나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무서웠다. 화를 내는 사람보다, 화조차 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이 참아온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아까 창고 뒤에서 들었던 대화를 그녀에게 말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말을 하면 그녀가 무너질까, 말을 안 하면 내가 방관자가 되는 걸까.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기 전에, 복도 저편에서 재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 짧은 이름 부름이었다. 존댓말도 아니고, 격식도 없는 부름. 그 한마디에 도서관 공기가 순간 바뀌는 걸 느꼈다. 권시아가 그 목소리에 반응해서 몸을 살짝 굳혔다가, 다시 원래의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전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온도의 언어로 인사를 주고받는 걸 나는 옆에서 지켜봤다. 한 사람은 반말로, 한 사람은 존댓말로. 그 간극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떤 설명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재헌은 나를 힐끗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권시아 쪽으로 다가갔다. "먼저 가시죠." "…네." 권시아는 나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재헌과 함께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방금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의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그 온기가 이상하게 서글펐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방금 들은 두 개의 진실—창고 뒤 대화와 권시아의 고백—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문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표적은 권시아였다. 그런데 왜, 누가, 무엇을 위해서. 학원 안의 파벌 다툼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했고,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직적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소율이 기숙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을 텐데, 오늘은 팔짱을 낀 채 발끝만 보고 서 있었다. "서윤아, 오늘 낮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다가왔어. 되게 친절했는데, 뭔가 좀 이상했어." "누군데?" "이름은 말 안 해줬어. 그냥 자기네 파벌 쪽으로 오면 안전할 거라고 하더라." 안전할 거라는 말이 오히려 위협처럼 들렸다. 안전을 강조하는 사람은 대개, 지금 네가 안전하지 않다는 걸 먼저 각인시키고 시작하는 법이니까. "소율아, 그 사람 얼굴 기억나?" "어렴풋이. 근데 서윤아, 나 무서워." 그 말을 하는 소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나는 소율의 손을 꽉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파벌 다툼이 이제는 소율에게까지 직접적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는 걸,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불빛 몇 개가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밤 풍경이었는데,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른다는 게, 가장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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