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오빠 이도현은 상급생이었고, 학원 안에서 얼굴 넓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복도를 걷다 보면 열 걸음마다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후배, 선배,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도 오빠 이름을 알았다. 아무나하고 다 친하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는데, 이번엔 그게 정보력으로 발휘될 참이었다.
내가 오빠를 찾아간 건 순전히 계산속이었다. 소율이 걸음걸이가 이상해지고, 뒤뜰에서 재헌이 권시아를 감싸는 장면을 보고 난 뒤부터,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누구한테라도 풀어놔야 살 것 같았고, 그 대상으로 오빠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정보는 빠르고, 입은 무겁고, 무엇보다 나를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 유일한 상급생.
복도 구석 벤치에 나를 앉히고, 오빠는 자기도 옆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낮춤이 좀 웃겼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꼭 스파이 영화 찍듯이.
"소율이 요즘 어때."
"안 좋지 뭐. 매일 사람들한테 끌려다녀."
"끌려다닌다니?"
"파벌 애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봐. 성녀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갈 때도 따라붙어."
오빠는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이 순간 낯설었다. 평소엔 웬만한 일에 눈썹도 안 움직이는 사람인데.
"파벌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성녀 후보가 나왔다는 게 그냥 종교 뉴스가 아니야. 어느 세력이 그 애를 먼저 데려가느냐가 앞으로 몇 년 판도를 바꾸는 일이거든."
"그건 나도 알아. 근데 소율이는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애야."
"관심 없어도 상관없어. 그 앤 이미 판 위에 올라간 거야."
오빠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진심 어린 걱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반박할 게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다. 소율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게임판 위에 놓인 말이었다. 그것도 제일 비싼 말.
"근데 오빠. 그 파벌들, 정확히 뭘 원하는 거야? 성녀를 데려가면 뭐가 좋은데."
"명분. 권력. 그리고 상징성. 성녀가 어느 세력 편에 서 있다는 그림 자체가 힘이야. 왕실이든 귀족이든, 종교적 정당성만큼 확실한 무기가 없거든."
"완전 정치판이네."
"학원이 원래 정치판이야. 몰랐어?"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냥 실감을 안 하고 살았을 뿐이지.
"그리고 하나 더."
"뭔데."
"권시아 영애 말이야. 요즘 걔 근처에서 좀 이상한 냄새가 나."
권시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등이 저절로 곧게 펴졌다.
"오빠, 권시아 영애 만난 적 있어?"
"있지. 작년에 한 번, 무도회에서."
오빠가 이렇게 담담하게 대답하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학원 전체가 그녀를 '악역 영애'라고 부르는데, 오빠는 아무런 편견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 흔한 비웃음이나 조롱기 하나 없이.
"어떤 사람이었어?"
"조용하고, 예의 바르고, 좀 겁이 많은 애였어. 시녀한테 소리 지르는 것도 못 볼 인상이던데."
"진짜? 소문이랑 완전 다르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났대?"
오빠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만 벤치 위에 남았다.
"그게 좀 이상해. 소문이 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
"뭐랑?"
"왕태자가 걔 약혼녀로 확정된 시점이랑."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뒤뜰에서 봤던 장면, 계단에서 봤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겹쳐 떠올랐다. 재헌이 그녀를 감싸는 방식, 걸음을 살피는 방식, 목소리에 실려 있던 그 조심스러움. 그건 명백한 애정이었다. 소문 속의 냉랭한 정략혼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애가 타는 쪽에 가까운.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이게 단순한 궁금증인지, 뭔가 큰 걸 건드리기 직전의 불안인지 구분이 안 갔다.
"오빠. 나 좀 이상한 거 봤어."
"뭘."
나는 뒤뜰과 계단에서 목격한 장면들을 오빠에게 그대로 들려줬다. 재헌이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권시아를 잡아준 것, 그 손을 놓지 않고 한참을 붙잡고 있던 것, 뒤뜰에서 낮게 나눈 대화, 그리고 그 말투.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오빠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평소 여유롭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빠졌다.
"확실해? 그 말투 정확해?"
"어. '제가 안 괜찮습니다' 이런 말이었어."
오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턱을 문지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아. 그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왜?"
"만약에 그 두 사람이 진짜로 서로 좋아하는 관계라면, 그리고 그걸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 소문—권시아를 악녀로 만드는 그 소문 자체가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거일 수도 있어."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벤치의 나무 냄새, 창밖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 그런 것들이 갑자기 다 낯설게 느껴졌다.
"누가 왜 그런 짓을?"
"왕태자 약혼녀 자리를 흔들고 싶은 사람이 누구겠어. 그리고 딱 그 시점에 성녀 후보가 나타난 것도."
"그럼 소율이랑 권시아 영애가 연결돼 있다는 거야?"
"직접적으로는 아니겠지. 근데 같은 판에서 움직이는 말들일 수 있어. 성녀 후보라는 카드, 왕태자 약혼녀라는 카드. 둘 다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큰 조각들이야."
오빠는 말을 하다 말고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너무 큰 그림을 그리다가 자기 자신도 겁이 난 것처럼. 그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오빠가 겁먹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오빠,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근데 학원 안 파벌들 이번 학기 들어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너무 정확해. 원래 이렇게 서두르는 애들이 아니거든."
"평소엔 어떤데?"
"평소엔 눈치 보고, 재고, 몇 달씩 뭉그적거려. 근데 이번엔 달라. 성녀 후보 소문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각 세력이 접선 시도를 하고 있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려면, 누군가 미리 판을 짜놓은 거야."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창밖을 봤다. 어둑어둑해진 정원, 그 너머로 학원 본관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늦가을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꼭 지금 내 머릿속 같았다. 정리가 안 되는데 자꾸 뭔가 움직이는 느낌.
"소율이 조심시켜. 그리고 너도."
"내가 뭘 조심해."
"방금 얘기한 거, 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야. 이 학원에서 진실이 제일 위험한 무기라는 거, 잊지 마라."
"오빠는 그럼 뭐 할 건데?"
"나야 정보 좀 더 모아봐야지. 근데 확실한 거 하나는, 이 판에 발 담그면 쉽게 못 빠져나온다는 거야. 너 이미 반쯤 담근 것 같은데."
그 말에 뭐라 대꾸하려는데, 오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한 번 툭 쓰다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를 걸어갔다. 늘 그렇듯 걸음이 여유로웠다. 방금 그렇게 무서운 얘기를 한 사람 같지 않게.
나는 벤치에 혼자 앉아서, 방금 들은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성녀 후보, 악역 영애, 왕태자,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 조각조각은 다 알겠는데, 그 조각들을 하나로 붙이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감이 안 잡혔다.
와, 이건 완전히 다른 판이었네.
나는 그저 소꿉친구 하나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학원 전체를 흔드는 이야기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게임에서 튜토리얼 스테이지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알고 보니 최종 보스 방이었던, 그런 느낌.
정원의 불빛이 하나씩 늘어나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게 그냥 우연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녀 후보와 악역 영애가 같은 시기에, 같은 학원에서, 이렇게 얽혀 들어간다는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그 그림 안에 소율이도, 권시아도, 어쩌면 나까지도 이미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
벤치에서 일어나며 나는 재헌의 얼굴을 떠올렸다. 계단에서 권시아를 잡던 그 손, 뒤뜰에서 나누던 그 낮은 목소리. 그 사람이 이 판을 짜는 쪽인지, 아니면 판 위에서 똑같이 흔들리고 있는 말인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 와서 모른 척 뒤로 빠지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