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순진한 딸은 죽었어요

1화

편전의 새벽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촛불만은 대낮처럼 환하게 타올라 벽면에 걸린 용 문양의 그림자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벽을 타고 꿈틀거렸고, 심지가 타는 소리마저 이 정적 속에서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현은 상석에 앉은 채 팔걸이를 손끝으로 느리게 두드렸는데, 그 소리가 정적을 메우는 유일한 리듬이었다. 마치 시간을 재는 시계추처럼, 두드림과 두드림 사이의 간격이 편전을 가득 채운 대신들의 숨소리마저 짓눌러 놓았다. 무릎이 꿇린 채 바닥에 엎드린 사내는 예조판서 조인성으로, 사흘 전까지만 해도 조복을 갖춰 입고 조정의 상석에 앉아 있던 자였으나 지금은 포박된 손목에 새끼줄이 파고들어 살갗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의 관모는 어디론가 벗겨져 사라졌고, 흐트러진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식은땀과 함께 번들거렸다. 사흘 전만 해도 조정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목청을 높였던 그 위세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몸을 짓누르는 냉기 앞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묻겠다." 이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낮음 속에 서늘한 무게가 실려 있어, 편전을 채운 대신들은 저마다 숨을 죄어야 했다. "네 집 창고에서 나온 세곡 장부, 그것이 정말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 생겨난 것이라 주장하는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조인성은 이마를 바닥에 짓이기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 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는데, 밤새 국문을 받은 목이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탓이었다. "신은 결코 그런 문서를 지닌 적이 없사옵니다. 누군가 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분명하옵니다." "함정이라." 이현이 되뇌며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 순간 편전을 메운 촛불의 흔들림마저 멈춘 듯했다. "그 함정을 놓은 자가 누구인지, 네가 짐작조차 못한다는 것이냐." 조인성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그가 사흘 전 올린 상소, 왕위 후보 지명이 종묘사직의 근간을 흔든다며 서출의 왕녀를 겨냥해 날카롭게 세운 그 문장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 새겨 넣던 그 문장들, 왕녀의 혈통을 문제 삼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했던 그 오만한 언사들이, 실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삽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신이... 신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다만 그 상소를 올린 뒤로 신을 주시하는 눈길이 늘었다는 것만은..." "입 다물라." 이현이 말을 잘랐다. 목소리에 실린 힘이 조인성의 다음 말을 그대로 끊어놓았다. "확증도 없이 억측만 늘어놓는 것을, 짐은 죄인의 발버둥이라 부른다." 좌우로 도열한 대신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그들의 조복 자락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그 긴장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누구도 먼저 나서서 조인성을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조인성을 지지했던 자들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그의 편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이 편전의 냉기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술잔을 나누며 조정의 앞날을 논했던 이들마저, 지금은 그저 바닥의 나뭇결만을 응시하며 이 사태가 자신에게 옮겨붙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금군은 죄인을 하옥하라." 이현이 손짓 하나로 명을 내리자, 금군 두 명이 성큼 다가와 조인성의 양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조인성은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목을 꺾어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항변하려 했으나 그 입에서는 신음 같은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의 발끝이 바닥에 끌리며 남긴 흔적이, 마치 그가 붙잡으려 했던 권세의 마지막 자락처럼 편전 바닥에 희미하게 그려졌다. 대신들이 하나둘 물러가고 편전에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을 때, 이현은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촛불의 그림자가 그의 이마 위로 길게 늘어졌고, 그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방금 전까지의 국문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밀고가 너무 정교했다. 조인성의 창고에 누가 그런 문서를 심어놓았는지, 또 그 즉시 어사에게 밀고가 들어갈 수 있었는지, 짜인 각본처럼 매끄러운 흐름이 오히려 그의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밀고는 대개 몇 달을 두고 은밀히 준비되는 법인데, 이번 것은 상소가 올라온 지 불과 사흘 만에 완결된 형태로 나타났으니. "전하." 낮고 조용한 음성이 커튼 뒤에서 흘러나왔다. 백유모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현의 유모였고, 지금은 왕궁의 그늘 속에서 그의 눈과 귀 노릇을 하는 여인이었는데, 걸음걸이가 어찌나 조용한지 그 존재를 알리는 것은 오직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그녀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서는 모습은 마치 물뱀이 수면 위로 미끄러져 나오는 것과도 같았으니, 소리도 없이 그저 존재만이 스르르 드러나는 식이었다. "들어오라." 백유모는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만 깊이 숙였다. 이현이 그녀에게 허락한 유일한 예법이었다. "밀고자에 대해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이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해보라." "조인성의 창고에 그 장부를 넣은 손과, 어사에게 밀고를 넣은 입이, 같은 사람의 뜻에서 나왔다는 것을 신이 확인하였사옵니다." 백유모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으나, 그 담담함 아래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어, 이 편전의 벽마저도 그 말을 흡수해 삼켜버리는 듯했다. "그 뜻을 낸 이는... 서윤 왕녀이시옵니다." 이현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일렁이며 지나갔고,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딸의 이름을 속으로 되새겼다. 서윤. 아직 열 살, 궁 안에서도 조용히 지내던 그 작은 아이의 이름이 이런 자리에서 언급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열 살의 아이가, 예조판서를 겨냥해 이토록 정교한 함정을 짜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으나, 놀라움보다 먼저 차오른 감정은 이상하게도 흡족함에 가까웠다. "확실한가." "확실하옵니다." 백유모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왕녀께서 직접 신에게 말씀하셨사옵니다. '조인성의 상소는 나를 죽이려는 첫걸음이었으니, 그가 먼저 넘어지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이현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라, 유용한 검을 발견한 자의 미소였다. 그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그 리듬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방금까지 조인성을 죄어들던 서늘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헤아리는 듯한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그 아이가..." 하지만 그 미소 뒤로, 그의 눈에는 아주 작은 의문이 스쳤다. 며칠 전 딸이 무심코 흘렸던 말, '이번이 세 번째'라던 그 알 수 없는 발언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세 번째라니. 그렇다면 앞선 두 번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현은 그 말을 곱씹으며 턱을 매만졌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딸의 재능을 확인한 이 순간이, 앞으로의 조정을 다스리는 데 어떤 쓸모가 있을지를 먼저 헤아려야 했다. "유모." 이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아이가 앞으로 이런 일을 벌일 때마다, 짐에게 먼저 알리도록 하라. 세상에는... 아이의 손이 너무 일찍 피에 물들면 안 될 이유가 있느니라." 백유모는 고개를 숙였으나,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잠깐 비틀렸다는 것을 촛불 아래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 뒤 뒷걸음질로 물러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소리 없이 스러지는 뱀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편전의 문이 조용히 닫히고 나서도, 이현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딸의 이름을 되뇌었다. 세 번째라는 말의 의미를,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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