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순진한 딸은 죽었어요

4화

보름이 흐르는 사이 대궐은 조인성의 실각으로 인한 소란을 서서히 잊어갔고, 대신 사교 데뷔 행사에 대한 소문만이 대신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갔다. 왕이 서출의 왕녀를 정식으로 왕위 후보로 세우려 한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으나, 그 왕녀가 실제로 어떤 얼굴,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직접 본 이는 아직 드물었다. 소문은 늘 실체보다 앞서 달리는 법이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녀가 조인성을 몰락시킨 냉혹한 계집이라 말했고, 또 누군가는 왕의 눈을 흐리는 요망한 서녀라 폄훼했다. 어느 쪽이든 그 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는데, 그것은 곧 그녀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연회가 열리는 날, 대전 옆 대궐 정원은 황금빛 등불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불빛이 대신들의 관복 자락과 여인들의 비단 치맛자락 위로 어른거리며 낮보다 화려한 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사들의 선율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그 선율 사이를 파고들며 정원 전체를 가득 채웠다. 연못 위로 등불이 비쳐 물결마다 잔잔한 금빛 파문이 일었고, 그 위를 오가는 나비 모양의 종이 등롱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저기, 저 왕녀님이신가."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조인성 대감을 몰락시킨 그 아이 말이야?" "쉿,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게." 하지만 그 속삭임은 이미 정원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고, 그 소문의 중심에는 아직 정원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서윤이 있었다. 이서윤은 대전 곁방에서 옷매를 다듬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백유모가 골라온 예복은 짙은 자줏빛 비단으로, 그 색은 화려한 붉음도 아니고 차분한 남색도 아닌, 권위와 위엄을 동시에 함축한 색이었다. 시녀들이 머리를 올리며 은장식을 꽂는 동안, 이서윤은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낯설도록 차분했다. 열 살의 얼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이었으나, 그녀는 그 침착함을 애써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이 순간을 되새겨 보았다. 대전 안에서 왕이 자신을 지지하겠노라 선언했던 그 목소리를, 조인성이 무너지던 순간의 서늘한 정적을,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 도사린 대신들의 적의를. *완벽하지 않아도 돼.* *완벽함으로 사랑받으려 하지 않을 거니까.* 그녀는 시녀에게 손을 들어 화려한 장신구 하나를 도로 내려놓게 했다. "이건 빼도록 해. 너무 어려 보이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니까." 시녀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지시대로 움직였다. 백유모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직이 웃었다. "왕녀님께서는 벌써 궁의 셈법을 다 아시는 듯합니다." "셈법이 아니라 생존법이지요, 유모." 이서윤이 담담히 답했다. 그 말투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서늘함이 배어 있어, 백유모는 순간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원 입구에 이르러 이서윤은 잠시 멈춰 섰다. 대신들과 사절들의 시선이 이미 그녀 쪽을 향해 있었는데,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보다 경계와 의심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서출로 태어나 숨겨져 자라다가 갑작스레 왕위 후보로 지명된 아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자리의 절반 이상이 그녀를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몇몇 여인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고, 나이든 대신들은 아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못 본 척하기까지 했다. 그 무시조차, 이서윤에게는 하나의 신호였다. 그들이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서윤은 그 시선들 앞에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정원 중앙을 향해 곧게 걸어 들어갔다. 그 걸음걸이는 뱀이 풀숲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것처럼 조용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치맛자락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마저 정원의 소음 속에 삼켜지지 않고 또렷하게 울려,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이서윤이 상석에 앉은 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현은 그녀를 지켜보며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고, 그 미소가 대신들의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는 사실이, 이서윤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되새겼다. 이 자리에서 왕의 총애만큼 확실한 방패는 없었다. "왕녀는 오늘 이 자리의 주인 중 하나다." 이현이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그렇게 알고 예를 갖추라." 그 한마디에 정원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대신들 중 일부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으나, 몇몇의 눈빛에는 여전히 노골적인 반감이 서려 있었다. 그중 한 노대신이 앞으로 나서며 낮게 말했다. "전하, 왕녀님의 지위는 아직 정식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았사온데, 이 자리의 주인이라 칭하심은..." "경은 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 이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으나 그 안에 실린 위압은 대신의 말을 단번에 끊어놓았다. 노대신은 이내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희게 질렸는데, 그 낯빛의 변화만으로도 정원에 모인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의 말이 곧 법인지를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대신들 사이에서도 낮은 침음이 흘렀다. "저리 노골적으로 감싸시다니…" "쉿,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저 노대신의 신세가 될 것이오."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 담긴 불안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 순간 백유모가 은근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이서윤의 곁에 섰다. "왕녀님, 저쪽에 계신 청강국 사절께서도 왕녀님께 관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인사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표면적인 존대 아래 은근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사절과의 인연은 곧 왕녀의 세력을 넓히는 발판이 될 것이었다. 이서윤은 백유모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대신들 사이에서 옅은 술렁임이 일었고, 몇몇 젊은 관료들은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국왕의 노골적인 지지에 압도되어 슬며시 시선을 낮추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이서윤은 이 궁궐 안에서 자신이 그저 밀려난 서녀가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는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그 우위는 오래가지 않을 운명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원의 황금빛 등불 아래에서 이서윤의 존재감이 가장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왕녀님." 청강국 사절이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소인의 나라에서도 왕녀님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조 판서를 처결하신 그 결단력이란..."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이서윤이 담담히 받아쳤으나, 그 담담함 속에는 소문이 퍼진 것을 즐기는 기색이 미묘하게 배어 있었다. "과장이라 하시기엔," 사절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얼굴빛이 너무도 진지하지 않습니까." 그의 시선이 슬쩍 옆의 대신들을 향했다가 다시 이서윤에게로 돌아왔다. "왕녀님께서는 앞으로도 소인의 나라와 좋은 인연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절께서 먼저 진심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서윤의 대답은 짧았으나, 그 안에는 상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함이 실려 있었다. 사절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웃음으로 얼버무렸는데, 그 웃음이 아까보다 조금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놓치지 않았다. 그때 정원 저편에서 갑자기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몇의 나직한 탄성처럼 들리던 소리가 점점 번져나가며 정원 전체를 뒤흔드는 파도처럼 커져갔고, 악사들의 선율마저 그 소음에 삼켜져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좇아 이서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그 웅성거림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등불 아래 사람들의 얼굴에 스치는 낯빛의 변화만이, 이 정원에서 일어난 그 무언가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