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뜨면 늘 같은 천장이었다.
금박을 두른 문양, 창을 가린 두꺼운 커튼, 침대 옆에 놓인 촛대까지 전부 익숙했다.
열한 해째 보는 풍경이었다.
천장의 금박 무늬 하나하나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오른쪽 구석에 살짝 벗겨진 부분, 그 아래 미세하게 갈라진 틈. 처음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는 그런 것조차 낯설고 무서웠는데, 이제는 익숙함이 오히려 서글펐다.
'오늘도 이서윤으로 사는구나.'
스물다섯 살, 야근에 지쳐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그날의 충격은 이제 무뎌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처음 며칠은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도 깨지 않자 미쳐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서야 받아들였다.
이건 현실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구체적인 현실.
검은 머리, 짙은 자줏빛 눈동자. 게임 속에서 수도 없이 화면 안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 거울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악역 영애 이서윤.
황태자의 정략 혼약자였고, 원작 게임 '비 갠 뒤 사랑 소나기'의 발단이자 몰락의 축이었다.
내가 그 게임을 얼마나 많이 플레이했던가. 야근 끝나고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이서윤이 파멸하는 엔딩을 몇 번이나 돌려 봤던가. 그때는 그저 화면 속 캐릭터였다. 지금은, 나였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문이 열리며 박다인이 들어왔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시녀였고, 열한 해 동안 곁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늘 걸음이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이 궁에서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다인 하나뿐이었다.
"응. 몇 시야?"
"아침 일곱 시예요. 오늘은 황후궁 예법 수업이 있으니 서두르셔야 해요."
다인이 대답하며 커튼을 걷었다. 빛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궁정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안에는 늘 무언가 숨어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 잘 다듬어진 산책로, 저 멀리 보이는 황후궁의 지붕까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 뒤에는 언제나 계산과 감시가 있었다.
다섯 살의 나는 이 궁에 들어왔고, 그날 이후로 바깥세상과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교육, 예법, 정치, 그리고 감정을 숨기는 훈련.
친구는 없었다. 다인을 제외하면.
다인이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빗살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감촉이 익숙했다. 이 아침의 의식도 열한 해 동안 변한 적이 없었다.
"아가씨, 오늘 아침에 궁 안에 소문이 좀 돌더라고요."
다인이 머리를 빗겨 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문?"
"남작가의 한소연 영애 얘긴데……"
손끝이 순간 멈췄다.
한소연.
원작 게임의 여주인공 이름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익숙한 이름인데,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그 영애가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한다고 해요. 이번 봄 연회에서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초청장을 보내셨다고……"
다인의 목소리가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빗을 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는지, 다인이 잠깐 손을 멈췄다.
"아가씨?"
"아니, 괜찮아. 계속해."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벌써 시작되는 건가.'
머릿속에서 게임의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첫 등장, 첫 만남,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벌어지는 사건들.
원작에서 한소연은 남작가의 밝고 건강한 영애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황태자 이현준의 마음을 얻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 이서윤은 그 관계를 질투하며 그녀를 괴롭히고, 끝내는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파멸하는 악역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 결말이 몇 줄의 텍스트로 스쳐 지나갔다.
'악역 영애 이서윤, 결국 처형된다.'
그게 전부였다. 게임 화면에는 짧은 삽화 하나와 몇 줄의 문장, 그리고 다음 화 넘김 버튼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텍스트 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 몇 줄의 텍스트가 내 목숨이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세요."
"괜찮다니까."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말을 삼키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한소연이 사교계에 등장한다는 건, 원작의 시계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시계의 끝에는, 내 죽음이 있었다.
다인이 다시 빗질을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손끝은 부드러웠지만, 눈치는 여전히 살피고 있었다. 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이 궁에서 감정을 들키는 건 곧 약점을 들키는 것과 같았다.
창밖으로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평온해 보였지만, 나는 그 평온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봄 연회까지 남은 시간, 황태자와 한소연이 처음 만나게 되는 정확한 시점, 그 이후 벌어질 사건들의 순서.
원작에서는 이 시점 이후로 모든 게 급물살을 탔다. 황태자의 마음이 조금씩 기울고, 나는 그걸 견디지 못해 무리한 짓을 벌이고,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 나는 죽어.'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궁 안의 누구도,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거울 속의 다섯 살짜리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마주 보고 있었다. 저 얼굴 뒤에 숨은 스물다섯의 나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봄 연회까지, 얼마나 남았지.'
다인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돈하며 리본을 매어 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