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의 나는 처음으로 이 궁에 발을 들였다.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날의 냄새만큼은 선명했다. 낯선 향, 낯선 바닥의 서늘함. 대리석이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이상하게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 정확히는 이서윤의 부모는 후작가의 사람들이었고, 나를 정치적 자산으로만 여겼다.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마치 물건의 값어치를 재는 상인처럼.
어머니는 그보다 더했다. 내가 몇 마디 말을 잘하면 흡족해했고, 조금이라도 어눌하면 얼굴을 굳혔다.
다섯 살배기 딸이 황태자의 혼약자가 된다는 소식에 그들은 축배를 들었지만, 정작 내가 어떤 마음일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저택 안이 온통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것을 기억한다. 정작 나는 그 웃음의 이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이였는데도.
민서화 황후가 나를 처음 본 그날, 그녀는 내 눈동자 색을 보고 말했다.
"자줏빛이라니, 독특하구나. 이 아이로 하자."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이었다. 보석을 감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혼약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궁 안에서 자랐다. 친부모와의 접점은 거의 사라졌고, 나는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도구로 다듬어졌다.
예법 선생이 매일같이 들어왔다. 걸음걸이, 인사하는 각도, 찻잔을 드는 손의 모양까지 전부 점검받았다.
틀리면 다시. 또 틀리면 또 다시.
다섯 살, 열 살, 열다섯 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두 개의 기억을 동시에 가진 채 살아갔다. 스물다섯 살 직장인이었던 기억, 그리고 다섯 살부터 이 궁에서 자란 이서윤의 기억.
두 기억은 완전히 겹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처럼, 이질적인 부분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가끔은 손끝의 감각조차 헷갈렸다. 스물다섯의 내가 쥐던 스마트폰의 무게와, 열여섯 이서윤이 쥐는 부채의 무게가 뇌 속에서 겹쳐졌다가 다시 흩어졌다.
'이럴 때마다 정신이 반쪼가리가 된 것 같다니까.'
그리고 지금, 열여섯 살이 된 나는 처음으로 봄 연회에서 한소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연회장은 화려했다. 샹들리에의 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져 내렸고, 현악기 소리가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그 사이로, 밝은 갈색 머리가 걸어왔다.
동그란 눈. 화면 속에서 수백 번은 봤던 얼굴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한소연이었다.
"이서윤 영애님이시죠?"
목소리마저 익숙했다. 게임 속 삽화로만 보던 인물이 실제로 말을 걸어오는 순간의 낯섦.
'진짜 있었네. 진짜.'
"처음 뵙겠습니다. 한소연이라고 해요."
그녀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긴장한 사람의 전형적인 몸짓.
'맞아. 원작에서도 한소연은 나쁜 애가 아니었어.'
오히려 원작 속 이서윤이 먼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질투와 불안 때문에.
찻잔을 던지고, 뒤에서 험담을 흘리고, 결국 스스로 무너지던 이서윤의 결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반가워요, 한소연 양. 오늘 처음 데뷔하신 거죠?"
"네! 조금 긴장돼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손끝이 부채를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다. 이서윤과 한소연의 첫 만남. 갈등의 시작점.
나는 그 시작점을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연회가 낯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내 말에 한소연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감사해요, 영애님!"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주변에서 낮은 수군거림이 들렸다.
"저건 좀……"
"이서윤 영애가 저 영애에게 먼저 다가가다니."
부채로 입을 가린 귀족 부인들의 눈이 놀란 듯 커져 있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원작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었으니까.
원작 속 이서윤이라면 지금쯤 한소연의 옷차림을 트집 잡거나,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쳤어야 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시작은 나쁘지 않아.'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연회장 저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이현준이었다.
은발에 가까운 금빛 머리카락. 서늘한 인상의 얼굴. 원작 속 삽화 그대로였다.
그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한소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짧았지만, 분명한 순간이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인데도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벌써 시작되는 건가.'
원작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을지도 몰랐다.
내가 아무리 시작점을 비틀어도, 결국 그의 시선은 원작대로 한소연을 향하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 연회장 입구에서 다른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검은 머리, 파란 눈.
호위 기사의 복장을 갖춘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원작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