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황후궁의 응접실은 언제나 서늘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오래된 실크 냄새를 풀풀 풍겼고, 은으로 세공된 촛대는 불빛조차 차갑게 반사했다. 낮게 깔린 향냄새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 사람의 온기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발소리마저 삼켜버릴 만큼 매끄러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조차 이 방에서는 온도를 잃는 듯했다.
모든 것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제된 공간 한가운데, 민서화 황후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금발을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 차가운 눈빛. 황태자 이현준의 어머니이자, 열한 해 전 나를 며느리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늦었구나."
그 한마디에 담긴 온도는 딱 필요한 만큼의 차가움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손끝까지 신경 써야 했다. 이 방에서는 손끝 하나의 각도까지 평가받았다.
예법 수업은 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황후가 지적하고, 내가 고치고, 다시 지적받는 식이었다. 찻잔을 드는 손목의 높이, 고개를 숙이는 각도, 말끝의 억양까지도 전부 그녀의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찻잔이 채워지기도 전에,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봄 연회에 남작가의 영애가 참석한다더구나."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심장이 순간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을 한 번 삼켰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다잡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왜 지금 그 얘기를.'
"……한소연 영애 말씀이신가요?"
"그래."
황후는 담담하게 찻잔을 들었다. 도자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현준이가 직접 초청장을 보냈다더구나. 흥미로운 일이지."
흥미로운 일. 그 말이 유독 무겁게 들렸다. 황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나는 그 무표정 속에서 뭔가를 읽어내야만 했다.
"어머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손끝에 힘을 줬다.
"태자 전하께서 그 영애에게 특별한 마음을 두고 계신 건 아닐까요?"
그 순간, 황후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런 걱정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반박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어조였다.
"현준이는 너의 혼약자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이서윤."
황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마치 내 다음 말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처럼.
"너는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다. 감정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이게 함구야.'
황후는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만든 정략혼의 명분이 흔들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진실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체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대가는, 결국 내가 치르게 될 것이었다.
'황후 본인은 아무것도 잃지 않겠지. 잃는 건 언제나 나였을 테니.'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찻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표면에 담긴 차가 작게 파문을 그렸다.
"……!"
나는 재빨리 손을 뗐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지금 여기서 티 나면 끝장이야.'
황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예법 책을 펼쳤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수업은 그 뒤로도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문장도 제대로 머릿속에 담지 못했다. 황후의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왔지만, 내 사고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방을 나오는 동안, 나는 계속 그 순간을 떠올렸다.
회랑을 걷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무심하게 아름다웠다.
'황후조차 이렇다면, 이 궁 안에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은 없어.'
원작 속 이서윤이 왜 그토록 뒤틀린 방식으로만 애정을 갈구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이 궁 전체가 그녀에게 감정을 숨기라고만 가르쳤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솔직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정을 구걸하는 방식이 뒤틀려 있었던 것도, 결국 이 서늘한 응접실에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원작 속 이서윤과 달랐다.
나는 결말을 알고 있었다.
이서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강도윤이 어떤 얼굴로 검을 드는지, 그 모든 장면이 이미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마차에 오르며 나는 다인에게 낮게 물었다.
"다인. 너는 내가 지금부터 이상한 짓을 좀 해도, 곁에 있어 줄 수 있어?"
다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 좁은 공간에서 그녀의 시선이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당연하죠, 아가씨. 그런데 왜……"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나는 죽지 않을 거고, 도윤도 그런 결말을 맞지 않게 할 거야.'
혼약이 깨지는 것도, 살해 명령이 내려지는 것도, 전부 원작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흐름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마차가 궁을 벗어나 시내로 향하는 동안, 창밖 풍경이 조금씩 색을 되찾았다. 궁 안에서는 느낄 수 없던 사람 사는 냄새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첫째, 나는 죽지 않는다.
둘째, 강도윤이 그 검을 드는 일은 없게 한다.
셋째, 이 억지스러운 혼약을 내 손으로 정리한다.
세 가지 목표를 하나씩 되새길 때마다, 손끝에 남아 있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무력한 존재였다.
황후 앞에서 찻잔 하나 흔들리지 않게 다스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내가, 궁 전체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다인이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세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연회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소연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부르던 황후의 서늘한 목소리,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침묵까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차 바퀴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창밖의 풍경 대신, 아직 오지 않은 그 봄 연회의 밤을 미리 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