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파혼녀, 진짜 마법사

1화

샹들리에 불빛이 눈이 시릴 만큼 밝았다. 나는 그 아래, 벽에 딱 붙어 서 있었다. '벽의 꽃도 자리가 있어야 있는 거지.' 오늘은 그 벽마저 좁게 느껴졌다. 가온국 사교계의 봄맞이 연회. 매년 열리는 이 행사에 강 백작가 영애로서 참석하는 건 벌써 삼 년째였고, 삼 년째 나는 같은 구석에서 같은 표정으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자리 선정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기둥 옆,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 그러면서도 너무 눈치 없어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 삼 년이나 이 짓을 했으니 이제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전문가지, 전문가.' 주황빛 금발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두운 녹색 눈이 뭔가 음침해 보인다는 말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상처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번 더 듣고 나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그러니까 내가 눈에 안 띄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예쁜 언니 옆에서 굳이 반짝이려 애쓰지 않는 게 서로에게 편했다. 애초에 비교당할 무대에 올라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다.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뭔가가 어긋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자주, 그리고 길게 내게 머물렀다. 스치듯 지나가는 시선이 아니라, 힐끔거리다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귓속말을 하고, 다시 나를 보는 식이었다. 한 번이면 착각이라 치겠는데, 세 번, 네 번 반복되니 착각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뭐지.' 등 뒤로 서늘한 게 스쳤다. 부채를 접었다 펴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저기 봐, 강 영애 아니야?"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와인 잔을 들었다. 마시지도 않을 걸 왜 들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손이 허전해서.' 잔 속 붉은 액체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꼭 내 속 같아서, 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최근 우리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이 정도 관심도 나쁜 신호일 수 있었다. 소문이라는 건 늘 안 좋은 쪽으로 먼저 번지는 법이니까. 아버지, 강 백작은 반년 넘게 병상에 누워 계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이라고 했다. 의사들은 매번 다른 진단을 내렸고, 저택의 분위기는 그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용하다는 의사는 죄다 불러들였지만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다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은 조금씩 더 어두워졌고, 나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피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도 마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언니 강해은의 혼사만이 유일하게 밝은 소식이었다. 목 백작가 차남 목진하와 일곱 달 뒤 결혼할 예정이었다. 이 결혼이 성사되고부터 저택 안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돌았다. 하인들도, 어머니도, 심지어 몸이 안 좋으신 아버지까지도 그 얘기가 나오면 얼굴이 조금 풀렸다. '다행이지, 정말로.' 목진하. 그 이름을 떠올리면 아직도 목뒤가 뻣뻣해진다. 열 살 때였다. 저택 정원에서 마주친 그 아이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눈이 왜 이렇게 어두워. 마녀 같아." 그때 그 애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실을 말하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게 더 얄미웠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얼마나 오래 박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걔가 뭘 안다고.' 그런데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말이 생각나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별 볼 일 없는 인간이구나 싶었다. 어릴 적 상처는 꽤 오래간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이제 목진하는 언니의 혼약자가 됐다. 곧 형부가 될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언니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가족 모임에서 마주쳐도 나는 그저 웃으며 인사만 했다. 열 살 때 일을 기억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뭘 기억은 하겠어. 걔한테는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을 텐데.' 나만 오래 붙잡고 있는 게 억울하다면 억울한 일이었다. "강서은 영애님, 오늘 유독 눈길을 끄시네요." 옆에 있던 어느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칭찬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 웃음의 온도가 이상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놀리는 건가.' 아니면 뭔가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 후자라면 조금 무서운 상상이었다. "그런가요." 나는 최대한 무난하게 대답했다. 이럴 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표정을 읽히면 그 순간부터 소문의 재료가 되는 곳이 여기였다. 삼 년간 벽 옆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이 연회장에서는 얼굴 근육 하나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부인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시선들은 계속 쌓였다. 연회장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손짓하는 것도 보였다. '진짜 뭔가 잘못됐어.' 뒷목이 뻐근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유난히 건조하게 느껴졌다. 혹시 아버지 병세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도는 걸까. 아니면 우리 집안이 곧 몰락한다는 헛소리가 퍼진 걸까. 머릿속에서 별의별 시나리오가 굴러다녔다. 하나같이 불길한 것들뿐이었다. '차라리 그냥 옷이 이상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그편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 순간, 연회장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물결처럼 갈라지듯 움직였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진하람 공자님이시다."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사교계 최고의 미청년으로 불리는 진 후작가의 아들. 은빛 머리에 물색 눈, 설원국에서 삼 년간 유학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다는 그 진하람. 그가 온다는 소식은 며칠 전부터 돌았다. 오늘 연회의 진짜 주인공은 그일 거라고, 다들 그렇게 수군거렸었다. 먼발치에서 몇 번 스친 적은 있어도, 대화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왜 이 연회에 왔는지, 나로선 궁금하지도 않았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벽에 몸을 붙였다. 이럴 때는 눈에 안 띄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 쪽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처음엔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봤다. 뒤에는 벽뿐이었다. '그럼 진짜 나야?'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의 두근거림이 아니라, 뭔가 큰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그 불길한 두근거림이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와 그 사이로 몰려들었다. 부채가 손에서 힘없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연회장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숨을 죽인 채 그의 발걸음만 쫓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쪽으로 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