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파혼녀, 진짜 마법사

3화

누군가 내 팔을 잡아 부축했을 때에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영애, 괜찮으세요?" 낯선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그 눈빛 안에는 순수한 걱정만 있는 게 아니었다. '흥미로워하는 거 다 보여요.' "네, 괜찮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걸 목소리에 담을 이유는 없었다. 부인은 내 팔을 놓아주면서도 시선은 떼지 않았다.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 미소, 걷어치우세요.'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예의는 지켜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게 그거였다. 연회장은 이미 이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노골적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부채로 입을 가린 여인들, 눈썹을 찌푸린 채 팔짱을 낀 남자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강 백작가 영애가 진 후작가와 몰래 혼약을 진행했다더니." "근데 파혼당한 거야?" "불쌍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조각난 말들이 귀에 박혔다. '몰래 혼약이라니, 그런 거 애초에 없었는데.' 나는 억울했다. 억울한데 억울하다고 말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 순간 진하람은 이미 인파를 헤치고 연회장 밖으로 사라진 뒤였고,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뭐라도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본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벌어진 일에 내가 던질 수 있는 질문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버텨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병상에 계셨고, 언니 강해은은 오늘 다른 사교 모임에 참석 중이라 이 자리에 없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네.' 한숨이 나왔다. 짧게. 이럴 때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게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지금 이 연회장 안에서 누구도 나를 이렇게 함부로 흘겨보지 못했을 거다. 강 백작가의 이름값이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만만하게 보는 거지.' 집안이 흔들리면 사람들의 태도도 같이 흔들린다는 걸,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여러 번 배웠다. 연회장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벽에 등을 대고 서서,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보려 했다. 대리석 벽의 냉기가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그 서늘한 감각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는 데 도움이 됐다. 진하람은 나를 남궁서은이라고 불렀다. 남궁서은. 그 이름은 나도 몇 번 들어본 적 있었다.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는 남궁 백작가의 영애. 연갈색 머리에 헤이즐빛 눈을 가진, 소문난 미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랑 내가 어떻게 헷갈릴 수가 있어.'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이름이 같다는 것뿐이지, 그 외에는 겹치는 게 전혀 없었다. 외모도, 집안도, 사교계에서의 위치도 완전히 달랐다. 나는 주황빛 금발에 어두운 녹색 눈을 가졌고, 남궁서은은 사람들 입에서 몇 번이나 오르내리던 화사한 미인이었다. 옷차림도, 걸음걸이도, 심지어 목소리조차 닮은 구석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나를 지목한 거야.' 뭔가 착오가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 착오가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진하람과 나는 이번 연회에서 처음 마주친 사이였다. 그런 그가 다짜고짜 내 이름을 잘못 부르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로 다가왔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주변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진 후작가에서 정식으로 혼약 얘기가 나온 건 맞대. 근데 그게 강 영애 쪽이 아니라 다른 영애 쪽이었다는 소문도 있어." "그럼 오늘 저건 뭐야, 착각?" "글쎄, 진하람 공자님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교계 사람들에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 그게 나였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진하람이 사람을 착각했다는 시시한 사실보다, 강 백작가의 영애가 몰래 혼약을 추진하다 파혼당했다는 자극적인 소문이 훨씬 입에 붙기 좋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신나서 떠드는 거고.' 나는 눈을 감고 짧게 숨을 골랐다. '침착해야 해. 여기서 흔들리면 더 우스워져.'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흘러드는 말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 옷차림을 두고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내 표정을 두고 평을 늘어놓았다. 다들 나를 두고 한마디씩 얹는 게 오늘의 소일거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회장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낯익은 은빛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진하람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처음 보는 얼굴의 부인이 함께 있었다. 엄격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걸음걸이부터 위압감이 느껴졌다. 등을 곧게 세운 자세, 흐트러짐 없는 걸음, 주위를 압도하는 존재감.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부류였다. '저 사람은 또 누구야.' 주변 사람들이 그 부인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물결처럼 번지는 그 인사에 나는 뭔가 짐작이 갔다. '진 후작부인.'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제 진짜 시작인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진하람 한 사람의 착각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진 후작가 전체가 이 사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 무게가 다르다는 걸 모를 만큼 내가 순진하진 않았다. 부인의 눈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는 조금 전 진하람이 보여준 확신과는 다른, 뭔가 헤아리는 듯한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 사람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라기보다, 마치 서류를 검토하듯 차분하고 정확한 눈길이었다. '설마, 뭔가 더 밝히려는 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부인의 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뒤를 따르는 진하람의 표정에서는 아까와 같은 확신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굳어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등을 벽에 붙인 채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의 소음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다들 이 다음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숨죽인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들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다가오는 후작부인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부인이 내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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