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박도겸은 편전을 나서며 회랑을 따라 걸었다.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규칙적으로 울렸으나, 그의 머릿속은 그 규칙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햇살이 회랑 기둥 사이를 비스듬히 가르며 들어와, 그가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거두어들이곤 했다. 마치 그 빛조차 그의 걸음을 재는 듯했다.
강서윤이라는 이름이 입 안에서 굴러다닐 때마다, 그는 삼십 년도 더 지난 어느 겨울날의 기억이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날의 추위는 유난히 매섭고 날카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랑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의 등이 눈발 속에서 점점이 희어지고 있었고, 그 뒤로 관졸들의 발소리가 마당을 짓이기듯 울렸다.
그의 가문은 한때 조정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그러나 서윤의 조부가 언관으로서 올린 상소 하나로, 박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뇌물과 부패를 고발한다는 명분 아래, 정작 실권을 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이었다는 사실을, 박도겸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텅 빈 눈동자를 통해 배웠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대전에 들지 못했고, 집안의 가산은 나라에 몰수되었으며, 남은 형제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오직 그만이 이를 갈며 살아남았다.
그때부터였다. 정의를 외치는 자들의 얼굴 뒤에는 언제나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겉으로는 청렴을 말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자리를 채우는 자들의 낯짝을, 그는 셀 수 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강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서윤이 이제 그 조부의 자리를 대신해 개혁이라는 이름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계집이 앉을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어야 했다.
속으로 되뇌는 말은 짧고 날카롭게 끊겼다가, 이내 다시 건조한 걸음으로 이어졌다. 회랑 끝에서 그를 기다리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문서 뭉치를 건넸다. 시종의 낮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시전 상단과의 서신, 그리고 규수의 필체를 흉내 낸 초안까지 준비되었습니다. 필사한 자의 손이 워낙 정교하여, 원본과 대조해도 쉬이 구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도겸은 문서를 받아 든 채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문지르며, 그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종이는 얇고 매끄러웠으나, 그 위에 얹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의를 되찾는 일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그 물음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답을 내리는 순간, 자신이 지금껏 지켜온 명분마저 허물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서를 소맷자락 안으로 밀어 넣으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걸음걸이는 조금 전 회랑을 걸어올 때보다 더 단단하고 빠르게 변해 있었다. 마치 오래 숨죽인 뱀이 마침내 먹이를 향해 미끄러지듯 몸을 펴는 모습과도 같았다.
"박 경."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가 돌아보자, 유채린이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겸손한 낯빛을 유지했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조금 전 편전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반짝임이 어려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조심스러운 듯 보였으나, 그 조심스러움 안에는 계산된 속도가 숨어 있는 것도 같았다.
"제 증언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끝이 살짝 떨리는 듯도 했다. "저는 그저 본 것을 말했을 뿐인데……."
"본 것을 말했다고." 박도겸이 그 말을 되받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눈빛만이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훑고 있었다. "자네가 본 것과 자네가 만들어낸 것 사이의 경계가 어디쯤인지는, 자네 자신이 가장 잘 알겠지."
유채린의 표정이 잠시 굳었으나, 그녀는 곧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박 경께서는 늘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시험이 아니라, 확인이지." 그가 짧게 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회랑을 울렸다. "왕비 전하께서 자네를 아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으니."
"저는 그저 전하께 충심을 다할 뿐입니다." 유채린이 뒤따르며 말을 이었다. "박 경께서도 결국은 같은 마음이시지 않습니까. 강서윤이라는 이름 앞에서는요."
그 말에 박도겸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목덜미에 미세한 힘줄이 곤두서는 것을, 그는 애써 감추었다. 그러나 곧 다시 걸음을 내디디며 대꾸했다.
"내 마음을 함부로 짐작하지 말게. 자네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자네 앞에 놓인 계산뿐일 테니."
그 말을 남기고 그는 회랑 저편으로 사라졌다. 유채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계산 속에서 서윤이라는 이름을 다루고 있었으나, 그 계산의 결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유채린의 눈빛에 어린 반짝임만은, 그것이 순수한 충심이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박도겸은 왕비의 처소에 다시 불려갔다. 처소 안은 향유 냄새와 어스름한 빛이 뒤섞여 있었는데, 창을 가린 발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방 안 곳곳에 금빛 줄무늬를 그렸다. 조혜란은 그가 준비한 문서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훑는 동안,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조혜란이 문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 서린 서늘함은 감출 수 없었다. "책봉 연회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하니, 시일을 서둘러야겠어."
"책봉 연회, 라 하시면……." 박도겸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강서윤이 왕세자빈으로 정식 책봉되기 전에,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지." 조혜란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손가락이 문서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는 마치 이미 승부를 결정지은 사람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그 계집의 가면을 벗겨내는 거야. 그래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테니."
"연회의 자리에서라면, 준비가 더 필요할 것입니다." 박도겸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성급하게 움직이면, 오히려 저희 쪽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의심이야 늘 있는 법이지." 조혜란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방 안의 정적을 가르며 날카롭게 울렸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하다면, 그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게 되어 있어. 그러니 박 경, 자네가 마지막까지 그 확실함을 만들어주게."
박도겸은 고개를 숙였으나,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스친 것이 미소였는지 씁쓸함이었는지는 방 안의 어스름 속에 묻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소맷자락 안에 든 문서는, 여전히 무겁게 그의 팔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선 그의 눈앞에,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그 빛깔이 마치 오래전 아버지의 얼굴에서 사라진 핏기를 닮은 듯하여, 박도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은 소리 없이 회랑의 그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치 먹이를 향해 몸을 뻗은 뱀이, 다시 조용히 물러나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