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헌의 팔을 잡은 채 연회장 중앙으로 나아가는 동안, 서윤은 자신을 향하던 적의의 시선들이 조금씩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등 뒤에서 낮게 소용돌이치던 비웃음들은, 마치 물살에 씻겨 나가듯 서서히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당혹과 조심스러운 관망이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옆 사람과 무언가를 속삭였고, 또 누군가는 아예 시선을 피하며 잔을 들어 올리는 척했다. 왕세자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끄는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소문 따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단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현악의 선율도, 웅성거림도, 그 순간만큼은 서윤의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이헌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였다. "이곳에서 무너지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다."
그 말에 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조언이 옳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조언 속에 담긴 온도가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도 느꼈다. 예전의 이헌이었다면 이런 위기에서 그녀와 함께 분노하며 진실을 밝히려 했을 것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저들의 위선을 하나하나 찢어발기려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마치 정해진 각본을 수행하듯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온기가 있었으나, 예전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무언가 달라졌어.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챘으면서도, 서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온기에 기대기로 했다. 지금은 그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연회장 한쪽에 자리한 대신들 사이에서, 몇몇 젊은 관료들이 서윤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선 이는 예조의 젊은 낭관으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던 자였다.
"낭자를 뵙습니다. 그간 심려가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그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방금 전까지의 냉대와는 정반대되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두어 명의 관료가 더 다가와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왕세자가 직접 힘을 실어준 이상, 섣불리 그녀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다는 계산이 그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윤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그 미소 뒤에는 방금 전까지 그녀를 짓누르던 불안이 잠시 물러난 흔적이 엿보였다.
됐다. 오늘 하루만큼은, 저들의 혓바닥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장 입구 쪽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높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유채린 낭자, 입장하십니다!"
그 이름이 울리는 순간, 방금 전까지 서윤에게 향해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마치 물속에 던진 돌 하나에 잔물결이 번지듯, 연회장 전체가 순식간에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서윤 역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화려한 자태로 걸어 들어오는 유채린의 모습이 있었다.
은은한 자수정 빛의 저고리가 등롱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무대를 위해 연습해온 듯 우아하고 흠 없었다.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옥으로 만든 노리개가 잔잔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냈으며, 그 소리마저도 마치 계산된 연출처럼 완벽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시녀들의 조심스러운 몸짓조차,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몇몇 대신들이 낮은 목소리로 감탄을 흘렸고, 젊은 관료들 중 일부는 방금 전 서윤에게 예를 갖추던 것도 잊은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서윤의 손끝이 이헌의 팔 위에서 미세하게 굳어졌다. 이헌의 시선이, 그녀의 손이 닿아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미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짧았지만 분명했고, 그 짧음 속에 담긴 무언가가 서윤의 가슴 한복판을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방금까지 나를 다잡아주던 그 손이, 지금은 다른 곳을 보고 있구나.
턱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서윤은 애써 표정을 가라앉혔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풀며,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부터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질투인지, 억울함인지, 혹은 둘 다인지 그녀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그 다짐을 되새기며 서윤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려던 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다시 한번 무겁게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유채린을 향해 술렁이던 웅성거림도, 현악의 여린 선율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누군가가 커다란 손으로 연회장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더욱 크고 긴장된 어조로 울려 퍼졌다.
"왕비 전하, 입장하십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회장 안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마룻바닥에 무릎이 닿는 소리가 파도처럼 연회장을 훑고 지나갔다. 서윤 또한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으나, 그녀의 심장은 이미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왕비의 등장이었다.
이헌의 팔에 얹은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서윤은 애써 감추려 했다. 그러나 그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조혜란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연회장에 드리워진 등롱의 불빛마저 그녀의 걸음을 따라 일렁이는 듯했다. 검푸른 비단 위에 놓인 금실 자수가 은은하게 빛을 반사했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상궁들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연회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가다가, 이헌의 팔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서윤의 위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는 것을, 서윤은 소름이 돋는 등줄기로 직감하고 있었다. 마치 뱀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조혜란의 시선은 느리고 침착하게 서윤의 얼굴과 이헌의 팔에 얹힌 그녀의 손을 번갈아 훑었다.
연회장 안의 그 누구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