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쓴 세자빈 후보

4화

책봉 연회를 이틀 앞둔 밤, 서윤은 처소에 홀로 앉아 소문의 진원지를 되짚어보려 애썼다. 등잔불이 미미하게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그녀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이 마치 지금 그녀의 마음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자신이 문서를 유출했다는 소문은 명백한 거짓이었으나, 그 거짓이 궁 안에서 진실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누가 이런 말을 지어냈을까.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어, 누구의 귀를 거쳐, 이제는 온 궁을 뒤덮은 것일까. 서윤은 손끝으로 서책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지난 며칠간의 만남과 대화를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상궁들의 눈빛, 대신들의 헛기침, 시녀들이 슬쩍 나누다가 그녀가 다가오면 급히 그치던 이야기들. 그 모든 조각들을 이어보려 했으나, 실마리는 손끝에서 계속 빠져나갔다. 마치 물뱀을 손으로 붙잡으려 하는 것과 같아서,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사라지곤 했다. 이헌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이미 알고도 침묵하는 것인가. 그 물음이 며칠 내내 그녀를 괴롭혔으나, 정작 이헌을 마주할 기회조차 요즘은 쉽게 오지 않았다. 국사가 많다는 이유로 그는 회의 자리에서만 잠깐 얼굴을 비칠 뿐, 개인적인 대화는 이 주가 넘도록 없었다. 회의가 끝난 뒤 그가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서윤은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치솟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그의 등만 바라보곤 했다. 혹여 그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나서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애써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밀어냈다. 연회 당일 아침, 서윤은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단장을 시작했다. 명주로 지은 담청색 저고리와 치마가 그녀의 몸에 씌워졌고, 머리에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장식이 얹혔다. 시녀 하나가 머리를 매만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씨, 오늘은 좀 더 화려하게 꾸미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다른 규수들은……" "이대로 됐다." 서윤이 짧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시녀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화려함을 앞세운 명문가 규수들의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서윤은 그 소박함이야말로 자신다움이라 믿기로 했다. 비단에 금실을 두르고 보석을 매단다 한들, 그것이 자신을 이 궁의 사람들과 같게 만들어주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처럼 느껴졌다. 거울 앞에 앉아 마지막으로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눈동자가 예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의 눈빛과는 분명 달랐다. 그때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위로 무언가 얇은 갑옷 같은 것이 덧씌워진 듯했다. 흔들림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을 감출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강서윤이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이 궁에 들어왔고, 그 이유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새기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옷매를 가다듬었다. 손끝이 옷자락을 스칠 때마다 저고리의 결이 서늘하게 느껴졌는데, 그 서늘함이 오히려 그녀의 정신을 또렷하게 붙잡아주는 듯했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 회랑을 걷는 동안 궁녀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웅성거림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침묵. 서윤은 그 모든 것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은 이미 수많은 촛불과 등롱으로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등롱들은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명문가의 대신들과 그 자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규수들이 부채를 살랑이며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윤이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대화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끊겼다. 부채를 흔들던 손길도, 술잔을 기울이던 손길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리에는 곧 낮은 수군거림이 채워졌다. "저 규수가 문서를 유출했다는 소문의 그……" "체통도 없이 저잣거리 상인들과 결탁했다니." "어찌 저런 자가 이 자리까지 걸어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서윤은 그 말들이 화살처럼 자신의 등을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그녀는 연회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걸이는 조금 전 거울 앞에서 다짐했던 단단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오르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옆 사람에게 귀엣말을 속삭이며 서윤 쪽을 힐끗거렸다. 그 시선들이 모두 자신의 살갗에 닿는 것처럼 서윤은 느꼈는데, 그것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운 감각이었다. 적의로 가득한 시선들 속에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이 자리에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태생부터 이곳에 속한 사람들과, 노력으로 겨우 이 자리까지 걸어온 자신 사이의 간극이,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저들의 눈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은 이물질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그때, 낮게 깔린 웅성거림 사이로 한 사람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왕세자 이헌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무거운 예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금실로 수놓인 흉배와 검은 관대가 그의 체격을 한층 더 위압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최근의 냉담함 대신 짧은 순간 다른 빛이 스쳐 지나갔다. 연회장 안의 시선들이 이번에는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고, 몇몇 규수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가를 가렸다. "강 규수."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주변의 소음을 뚫고도 또렷하게 서윤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얹었다. 연회장 안의 수군거림이 다시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번에는 놀라움이 담긴 정적이었다. 몇몇은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낼 정도였고, 그 정적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연회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전하……." 서윤이 작게 그를 불렀으나, 이헌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팔에 얹힌 서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이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그녀 자신도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그가 짧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며, 마치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듯 단호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주변에 있던 대신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낮게 수군거리던 이들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몇몇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애써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말이 얼마나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 서윤은 그의 옆얼굴을 살피며 가늠해보려 했으나 쉽사리 알 수 없었다. 그의 턱선은 여느 때처럼 단단했고, 시선은 오로지 정면만을 향한 채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팔에 얹힌 자신의 손끝이, 오랜만에 온기를 되찾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연회장 중앙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서윤의 귓가에는 더는 아무런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침묵이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침묵 뒤에서, 더 날카로운 시선들이 자신을 향해 조여들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선들 가운데, 소문을 퍼뜨린 진짜 손이 어딘가에 숨어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등줄기에 스며드는 서늘한 예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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